세 돌 아이와 함께하는 제주도여행 4
내가 기억하는 한 나의 첫 호텔은 외할아버지의 칠순잔치였다. 해운대 파라다이스호텔서 온 가족이 코스요리를 먹고 하룻밤을 보냈다. 중학생때였다. 호텔에서 잔다는 것만으로도 잔뜩 긴장했었는데 밥까지 먹는다니. 처음 온 티 안내려고 하던 사춘기 소녀가 거기 있었다. 먹성 좋던 나의 9살 연하 남동생은 인생 첫 코스요리를 먹고 신난 나머지 뛰어다니다 토를 했는데(ㅋㅋ) 그 모습이 마치 드라마 육남매에서 인생 첫 고기미역국을 먹고 다음날 생을 마감한 아이의 모습과 겹쳐 너무 쪽팔렸다. 너무나 비교되게도 당시 싱가폴에 살던 사촌동생이 중국어 버전으로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다. 그 아이들은 호텔과 전혀 이질감이 없었다. 경험이란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아빠 덕에 전국의 많은 곳을 다녔지만 아빠는 신혼여행도 호텔에서 자지 않은 사람이다. 엄마는 첫날밤을 장에서 보내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도시여성이었다. 여관보다는 좋은, 호텔보다는 부족한, 모텔과 흡사한 숙소로 신혼여행을 가다니. 부잣집 딸에게 쫄지 않는 아빠의 기세였을까. 우리의 가족여행도 호텔은 어불성설이었다. 물론 아빠와 함께한 텐트에서의 하룻밤, 수련원, 리조트에서의 여행이 재미없었던게 아니다. 하지만 '호텔'에서의 경험은 없었다. 부자였던 외할아버지가 없었다면 나는 어른이 되어 내돈내산 할때까지 호텔에서 잘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에 반해 요즘 아이들은 호텔이 디폴트값이다. 나의 아이도 생후 8개월에 호텔에서 잤다. 물론 엄마인 내가 갑갑증을 못이겨 하룻밤 호캉스를 위해 찾은 거였지만 어찌됐든 호텔은 호텔이다. 그 사이 여러 호텔을 거쳐 이번 34개월 제주도행에서 호캉스의 정점을 찍는다. 조식, 뷔페, 수영장, 부대시설이 완벽한 제주 하얏트에서의 2박3일이다.
로비에서 체크인을 하며 신분증을 주는데 직원이 주민증에 있는 우리동네를 알은체한다. 오호. 시작이 좋다. 친절에 지연(地緣)까지 더해 1시간 정도 얼리췌크인 완! 고층까지 받으니 보너스라도 얻는 기분이다. 여행 전 주구장창 호텔에 메일을 보내며 허니문이다 뭐다 언질해도 띡 돈값한 방만 받았던게 부지기수인데(ㅋㅋ 나만 그러는거 아니죠?) 이번 여행 느낌이 좋다. 전체적인 톤이 빨강이라 중국자본 낭낭한 분위기가 왠지 거부감 들었는데, 객실 문이 열리네요 저멀리 한라산이 들어오죠 첫눈에 난 내 사랑인걸 알았죠. 왠걸 너무나도 넓고 좋은 방인것이다! 낮은층 방을 받았다면 마주보는 아파트 주민과 쎄쎄쎄 해야할 판인데 높은층 방이라 제주 시내가 그 큰 통창으로 한눈에 들어왔다. 아이도 신이 났는지 창문에 바짝 붙어 구경한다. 오메, 뿌듯한거!
넋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싸게싸게 수영장으로 가자. 아이는 한번도 대중수영장에서 수영한 적이 없다. 수족구에 씨게 데인 후 집 앞 물놀이장도 패스였다. 호텔 수영장은 물 순환이 되겠지? 넓어서 괜찮겠지? 안 가면 돈 아깝자나? 어찌됐던 호텔에 왔으면 뽕을 뽑고자 하는 나의 마음 한 구석에서 외쳤다. 나도 거의 10년 만에 수영장에 몸을 담궜다. 와 ㅋㅋㅋㅋㅋㅋ 너무 재밌어 ㅋㅋㅋㅋㅋㅋㅋ 물위에 둥둥 떠서 저 멀리 비행기 지나가는거 보고 썬베드에 누워 발꼬락 샷도 찍고. 아이는? 지금까지 수영장에 데리고 오지 않은게 미안할 정도로 신나있었다. 바다사나이 아빠의 피를 물려받은 것일까. 파닥파닥 발을 움직이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동영상만 수십개다. 입으로 코로 물을 먹으면서도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배가 고파질때까지 수영을 한 우리는 호텔 내 식당으로 향했다. 우리의 패키지는 조식 OR 중식뷔페 2회권, 바우처 10만 원 권이었는데 그 바우처를 식당에 쓰기로 했다. 내 눈 앞에서 구워 내 앞접시에 놓아지는 흑돼지를 보며 생각한다. 다짐한다. 다음 여름에 또 오기로. 그다음날의 조식도 훌륭했다. 거의 디너급인데? 오믈렛을 오물거리며 다시 또 다짐한다. 다음 여름에 꼭 온다. 우리는 탐험하지 않는다. 그저 즐기기만 한다. 아이가 좀 더 크면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편한게 좋다. 그저 쉬고만 싶다. 그때까지 제주는 우리의 최애가 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