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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디짱 Aug 23. 2020

스울 사람들은 평양냉면을 먹는다지

삼겹살이 남았다. 아니 남겼다. 종잇장처럼 바싹 익혀진 고기엔 어시스트가 필요하다. 공깃밥이냐, 냉면이냐. 얼큰한 된장에 밥을 적셔 고기를 스팸처럼 올려먹을지, 차가운 냉면에 고기를 싸 돌돌 말아먹을지. 오늘은 아무래도 이게 좋겠다. "이모~ 여기 물냉면 하나요!!"     


냉면은 자고로 고깃집의 후식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시판용 육수에 하얗고 얇고 쫄깃한 면. 이 한 그릇에 들어간 정성이라곤 아마 삶은 계란을 정확히 잘라 올린 그 정도가 아닐까. 냉면을 끼니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번듯한 냉면 전문점 하나 없는 부산에서 냉면의 위상은 높지 않다.      


대신 밀면이 있다. 살얼음 동동 떠있는 한방육수에 쫄깃한 노란 면발. 삶은 돼지고기와 무절임, 채 썬 오이, 삶은 계란이 올라가고 통깨를 쏟아 부었다. 위태롭게 올려진 푸짐한 고명 밑에는 어마어마한 다대기가 깔려있다. 다대기를 풀지 않고 한 번, 다대기를 풀고 또 한 번. 벌겋게 바뀐 국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면 달짝지근 맵짝지근 짭짝지근한 맛이 내 혀를 때린다. 부산의 여름은 밀면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심심찮게 들려오는 '스울'의 맛이 있다. 평양냉면. 난 평양냉면이 물냉면인지 비빔냉면인지도 헷갈리는데 서울 사람들은 이 평양냉면 한 그릇으로 더위를, 술기운을, 끼니를 해결한다고 했다. 얼리먹답터인 내가 놓칠 리가 없다. 마침 서울 한 달 살기가 예정돼있었다. 30일 90끼로는 부족한 먹킷리스트 식당들을 차곡차곡 쌓았고, 그 상단에는 궁금하고 궁금하던 평양냉면 집들로 채웠다.      


그렇게 처음 찾은 을지로의 냉면집. 연력이 느껴지는 식탁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물냉면이다. 비빔냉면, 아니 함흥냉면을 먹는 이가 없다. 서울과 같은 수도라고 평양만 좋아하는 걸까. 수도끼리 통하는 수도부심인가. 그러면서 나도 평양냉면을 시켰다. 아아. 드디어 이 미지의 음식을 먹는다지. 이것이 서울의 맛이란 말이지. 이어 나온 한 그릇. 똬리 튼 면 위에 소고기 편, 물김치, 절인 오이, 삶은 계란. 그리고 파? 흩뿌려진 고춧가루? 아니 이게 무슨 쇼킹 비주얼??? 뭐야 이 12000원짜리 메밀국수는???    


"일단 한 번 잡숴봐. 딱 스뎅 그릇에 니 입을 대는 순간 은은한 육향이 니를 감싸. 이어서 꺼끌꺼끌하이 메밀 면이 치고 들어오지, 그거 씹으면 구수함이 더해진다고. 처음이 어렵지, 세 군데만 가서 먹으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평냉, 평냉 한다? 이기 마 평뽕이요, 평냉 중독이지. 진짜 스울사람들은 술 마신 다음날엔 꼭 평냉 먹는다니까?" 내게 평양냉면을 먹어보라 조언했던 친구의 말을 떠올리며 일단 국물 한 모금. 이게 육향인가. 그냥 고기 우린 물에 간장 풀어 차갑게 식힌 것 같은데. 전혀 자극적인 맛이 없다. 면을 살살 풀어 후루룩 후루룩. 내가 지금까지 먹은 물냉면은 튼튼한 이로 끊어도 끊어도 끊어지지 않는데, 이건 뭐 이만 갖다 대도 툭툭 끊긴다. 다시 국물과 우물우물. 첫 경험이라 너무 기대가 컸던 걸까. 그 이후로도 이름난 두 곳을 더 찾았다. 갈수록 슴슴했고 갈수록 툭툭 끊겼고 갈수록 더 비쌌다. 내게 평양냉면은 동그란 안경을 끼고 양장점에서 맞춘 양복을 입은, 개화기 조선의 엘리트같이 느껴졌다. 고고하고 고상한 것이 나랑은 썩 어울리지 않았나보다. 흠. 평양냉면의 맛이란 무엇인가. 아니, 평양냉면이란 무엇인가!     


짧았던 서울 한 달 살이가 끝나고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밀면이 생각났다. 우리집은 밀세권이다. 부산 3대밀면으로 꼽히는 집에 쓰레빠를 질질 끌고 갔다. 더위를 이겨보겠다고 밀면집을 찾은 사람들이 34도 땡볕더위에 땀을 흘리며 줄을 서있다. 그 대열에 합류하면서 거칠고 투박한 밀면의 맛을 떠올린다. 달고 맵고 짠 부산의 맛을 떠올린다. 내 차례가 왔다. "이모~ 여기 물밀면 하나요!!"



부산에 오셔서 밀면 한그릇 고마 때리고 가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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