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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디짱 Dec 14. 2020

기내식은 하나도 먹지 않았어

29살의 나는 아홉수를 온몸으로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행동으로 뭔가 보여줘야 했는데 아무래도 혼자 유럽여행을 가는 게 젤 멋있어 보였다. 사실 나는 빠른 년생이라 진정한 아홉수는 아니었다만 하도 세상이 아홉수 아홉수 하길래 그냥 아홉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처럼 빠른 년생인 내 친구 박은 내 계획을 듣자마자 본인도 함께한다고 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혼자는 무서웠다. 그렇게 실제로는 28살인 박과 나는 로마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아홉수 여행을 떠났다.

우리는 이탈리아 본토 파스타와 스테이크와 젤라또를 하나라도 더 먹기 위해 가격이 저렴한 레이오버 비행기를 선택했다. 프랑크푸르트가 경유지였다. 루프트한자의 3-4-3 비행기는 육중했다. 유럽이 처음인 박을 위해 창가 자리를 양보하고 나는 3개 좌석의 중간을 자처했다. 난 엄마 또래의 아줌마와 박 사이에 낑겨 10시간의 비행을 시작했다.

박과 나는 완전한 사육을 꿈꿨다. 가능만하다면 기내식도 두 개 먹을 기세였다. 친절한 승무원이 나눠준 식단표를 분석하며 밥과 맥주와 와인과 컵라면을 쉴 새 없이 먹었다. A4용지만 한 케이지에 갇혀 포동포동 살찌우는 닭처럼 먹기만 했다. 박은 자동차 딱지 때문에 찾아와 쌍욕을 하는 민원인에 지쳐있었고 나는 그런 민원인들이 구청서 해결되지 않은 민원을 제보하는 것에 진절머리 나있었다. 먹고 마시고 보고 자고. 아무 생각 없는 단순함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했다.

그런 와중에 내 옆의 아줌마는 승무원이 권하는 모든 음식을 거부했다. 우리가 온갖 걸 먹으며 냄새만 풍길 때 오로지 물만 마셨다. 이나영과 원빈은 퍼스트 클래스 타고 잠만 잔다고 하던데. 아줌마도 그런 컨셉이신건가. 그거 안 먹을 거면 나주지 하는 생각을 하며 아줌마를 신기해했다. 그런데 아줌마도 우리가 신기했나 보다. 좀 많이 먹긴 했다.(ㅋㅋ) 아줌마가 먼저 친구끼리 유럽 가냐고 운을 뗐다.

50살의 아줌마는 패키지로 포르투갈에 가는 길이라 했다. 동행은 없다. 혼자다. 우리 엄마랑 몇 살 차이 안나 보이는데 골드미스인가 했다. 집에 남편과 아들 하나가 있다고 했다. 5년 전 아들의 수능을 마치고 선언했단다. 무조건 1년에 10일 혼자 여행을 떠나겠다고. 남편과 아들은 그해만 가고 말 줄 알았겠지만 아줌마는 그다음 해에도, 그 다음다음 해에도 떠났다. 그렇게 5년째라고. 유럽은 다 돌아서 또 미지의 세계인 포르투갈로 향한다고. 와 멋있다. 와 진짜 멋있다.

아줌마는 내가 우적우적 먹는 빵을 보며 말했다. 빵이 어느 나라 말인 줄 알아요? 포르투갈 말이에요. 몰랐죠? 나이가 50이 돼도 아직 신기한 게 많아요. 그래서 다니는 거예요. 일 년에 열흘, 나를 위해 그 정도도 못해주면 내가 왜 살아야 하는 건가 생각했어요. 내가 아가씨들 나이였음 혼자 계획 짜고 혼자 다니고 그랬을 텐데. 그건 어려워서 패키지만 따라다니죠. 그래도 배우는 게 많아요. 그게 어디예요. 이런 거 몰랐으면 억울해서 어쩔뻔했어요.

근데 왜 기내식은 안 드세요? 제일 궁금한 거였다. 아줌마는 일종의 단식이라고. 현지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일상에서의 모든 것을 버린다고. 그래야 하나라도 더 채운다고. 와. 진짜 캡이다. 와 진짜 짱이다. 하나라도 더 채우려는 나와는 아주 그냥 그릇이 다르시다. 아줌마. 진짜 짱이십니다요. 아줌마는 나에게 결혼을 하더라도 꼭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라고 말하며 대화를 마쳤다.

나는 자는 박을 깨웠다. 조그마한 화면의 비행기가 프랑크프루트에 거의 닿을랑 말랑 했다. 박은 기내식 주는 타임이냐고 물었다. 나는 이제 독일에 내릴 거니까 바이킹 맥주를 마실 거라고 말해줬다. 일단 채우자. 우리에겐 아직 비울 때까지 21년이 남아있으니까. 20대 아홉수에도 채우고 30대 아홉수까지도 채우자. 비우는 건 40대 아홉수부터 하자. 그때 우리도 가자. 포르투갈로!


기내식 하면 비빔밥이지!! 아주 그냥 맛이가 베리 구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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