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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디짱 Dec 27. 2020

나일롱 채식주의자

사흘만 있으면 서른다섯 살이다. 닷새 전 생일에 갓 서른네 살이 되었는데, 일주일 만에 한 살을 더 먹는 이 기분이란. 빼도 박도 못하게 서른 중반이 되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몸이 무겁다. 떡볶이 때문일까, 짜빠게티 때문일까. 넓적 당면 많이 넣은 찜닭 때문일 거야. 흑. 내가 사랑하는 많은 것들을 버려야 내가 사랑하는 많은 것들을 계속해서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슬프다. 그래도 묵을라면 끊어야제. 암. 그렇게 곡기를 끊었다. 밥, 빵, 면, 고기. 나의 반쪽을 넘어선 나의 모든 것들. 그리고 얼떨결에 채식주의자가 되어버렸다.


할 만은 하다. 가지를 굽고 버섯을 볶고 계란을 찐다. 달달을 넘어 이런 맛이 나도 될까 하는 스테비아 토마토도 먹고, 오이랑 당근이랑 브로콜리를 넣은 월남쌈도 먹는다. 라이스페이퍼는 눈감아주세요, 찡긋. 제일 좋아하는 건 두부! 두부를 으깨 오독오독 톳이랑 섞어서도 먹고, 유부 피에 넣어서도 먹고. 유부 피도 눈감아주세요, 찡긋. 하지만 먹으면서도 평생 삼시 세 끼로는 못 할 일이다, 매번 생각한다.


채식주의자를 실제로 만난 건 대학교 3학년 때다. 그는 내가 인턴으로 일했던 회사의 외국인 직원이었다. 우리가 함께 했던 후쿠오카 출장길, 비행기에서 우연히 그의 옆자리에 내가 앉았다. 나는 우유도, 계란도, 생선도 먹지 않는 찐 채식주의자인 그가 신기했다. 그는 "쏘우디이, 난 10살 때부터 고기 안먹었쒀요. 어느 날 갑자기 핫도그 위에 올려진 기다란 소시지가 내 손가락처럼 보였쒀요. 그 길로 딱 끊었쒀요. 그래도 보는 것처럼 키도 크고 건강해. 한국에서 고기 안 먹기 쉽지 않아요우."  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지만 속내는 달랐다. 아니, 어떻게 고기를 안 먹어? 외국인이라서 그런가? 우리의 이야기는 마무리됐지만 그 뒤로 난 코스트코 핫도그를 볼 때마다 그를 떠올렸다.


취직 후 회사에 입사해서도 채식주의자를 한 명 더 만났다. 40대 남자인 땡 차장은 나에게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고 홀로 채식을 영위하던 외국인과 달랐다. 땡 차장이 참여하는 부서 회식에 삼겹살 곱창 보쌈 족발은 제외였다. 땡 차장과 같이 점심이라도 먹을라치면 무조건 비빔밥이었다. 본인을 제외한 나머지만이라도 먹으라고 할 법도 한데 전혀 그럴 의사가 없어 보였다. 땡 차장과도 출장을 함께한 적이 있다. 오키나와였는데, 가이드가 찾아온 스테이크 집 앞에 20명을 세워놓고 왜 본인을 배려하지 않았냐며 갑질 했다. 내가 단체로 주문한 김밥 10줄을 보고는 왜 햄을 빼지 않았냐며 소리쳤다. 그 뒤로 나는 절대 땡 차장과 밥 먹을 일을 만들지 않았다. 채식주의자에 대한 혐오마저 생겼다.


요즘은 채식이 흔해졌다. 어떤 사람은 지구를 살리기 위해, 어떤 사람은 종교적 이유로,  어떤 사람은 건강 때문에 채식을 한다.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채식에서 힙의 기운이 느껴진다. 탄수화물과 고기를  먹다 보니 자연스레 풀때기만 먹게  나도 하루   정도는 채식해도 괜찮겠네,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채식하기 어렵다던  외국인 직원은 이제 도처에 깔린 샐러드 가게로 향하겠지. 채식주의자라서가 아니라 사람 자체가 못돼 처먹은  차장은 아직도 본인 의사만 강조하겠지. 나는 절대 삼시세끼 채식주의자는 되지 못하겠지.


톳두부 유부초밥 마이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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