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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디짱 Jan 06. 2021

오늘 아침엔 볼터치가 잘됐다

내 출근은 10시다. 남들보다 한 시간이 늦다. 누군가는 10시까지의 출근이 여유롭다 하겠지만 회사의 녹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에겐 6시 출근이든 10시 출근이든 아침에 바쁘기는 매한가지다.


어기적 어기적 일어나 가장 우선시 되는 건 얼음장같이 차가운 욕실에서 더 차가운 물을 한 4리터는 버리고 난 뒤 조금씩 뜨거워지는 물을 몸에 적시는 일. 발가벗고 따뜻한 물을 기다리는 시간이 억겁같이 흘러

차가운 물로 칫솔질을 먼저 해야 하나 느낄 때 즈음 따뜻한 물이 졸졸 흘러나온다. 자칫 조절을 잘못해 팔팔 끓는 물이 나오면 안 되니 조심조심 샤워기의 레바를 돌려 구석구석 씻는다.


그러고는 찍어 바르기. 밥보다 우선시 되는 화장인데 단 5분 안에 팩트를 펴 바르고 뷰러로 속눈썹을 그라데이션 하듯 찍어 올린 뒤 눈을 희번뜩하게 뜬다. 발림성 좋은 마스카라로 쓰윽쓰윽 하다가 아이라이너를 먼저 그려야 한다는 걸 까먹은 뒤 에잇 오늘은 그리지 말지 뭐 하곤 볼터치 붓을 광대에 한 번씩 쓸어내리고 파우치를 닫는다. 이게 나의 아침 루틴이다.


그런데 오늘은 보통과 같이 일어나고 보통과 같이 움직였음에도 시간이 남았다. 그래서 대구를 벌겋게 조린 생선요리에 하얀 쌀밥도 한 그릇 뚝딱하고 평소 신기가 불편해 멀리하던 첼시 부츠도 신고 아이라이너도 그릴 시간이 있었다. 그 와중에 볼터치가 잘되도 너무 잘된 것이다. 하루는 안 바른 듯 아무 표도 안 나서 생기 없이 화장 안 먹은듯한 얼굴이 되고 하루는 너무 과해서 출근하면 누가 꼭 “오늘 춥니” 물어보게 되는 내 볼터치가 오늘은 너무 잘된 것이다.


분홍색이 어울리지 않아 코랄색으로 하나 장만한 볼터치가 마치 태어날 때부터 장착된 내 뺨의 홍조인 양 발그스름하게 찰떡같이 달라붙어 출근길의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바라본 내 얼굴이 생기 있고 발랄한 30대 커리어우먼같이 보였다. 


룰루랄라 나선 출근길. 오늘은 왠지 기분이 좋아 하루가 왠지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에 로또를 살까 하며 아파트 쪽문으로 걸어갔다. 같은 쪽문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70대 후반 80대 초반 할아버지. 중절모를 쓴, 키가 큰. 나이가 들었음에도 나보다 꼿꼿한 허리. 잘 차려입은, 깨끗해 보이는 옷. 멋쟁이 시구나. 속으로 말하며 나는 횡으로 할아버지는 종으로 같은 쪽문을 향해 걸어갔다


나와 할아버지가 쪽문을 두고 누가 먼저 나갈 수 있을까 생각한 그때 내 귀 바로 옆에서 써라운드로 들린 소리 카악 퉤. 이 기분 좋은 아침에. 모든 것이 완벽했던 아침에, 한 달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이 아침에 나의 기분을 망치는 카악 퉤.


신사는 침을 뱉지 않는다. 신사는 숙녀를 향해 침을 뱉지 않는다. 신사는 설령 침을 뱉으려 해도 숙녀 쪽으로 침을 뱉지 않는다. 신사는 설령 침을 뱉어도 누군가가 정확히 알 수 있도록 침을 뱉지 않는다.


그래 출근길이 신날 수 없지. 출근길이 신나면 이상한 거야. 노동자가 일하러 끌려가는 이 길이 즐거울 수가 없어. 오늘도 회사에서 썩은 표정으로 9~10시간을 일하겠구나. 평소와 똑같은 하루가 되겠구나. 주말이 나의 날이구나. 그래서 이번 주말엔 뭘 할까? 하고 생각하게 된 오늘의 출근길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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