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디짱 Jan 10. 2021

서른 여섯짤 21학번입니다

남편은 서른여섯 살이다. 그에겐 대학과 직장을 함께 다닌 민이라는 친구가 있다. 그런데 그가 올해 대학 신입생이 됐다. 그러니까, 서른여섯 살의 민이 씨가 21학번이 됐다는 소리다. 그것도 수시모집 전형으로. 전혀 상관없는 전공으로. 일평생 살아본 적 없는 지역의 대학으로.


신혼부부였던 우리의 홈스윗홈에 자주 놀러 오던 이들은 남편의 싱글 친구들이었다. 민이 씨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일하며 집밥 세포가 결여된 그들을 위해 남편과 나는 성심성의껏 맛난 밥상을 차렸다. 재밌는 시간들이었다. 술 마시고 이야기하고 떠드는데 갑자기 민이 씨가 술이 확 깨는 말을 했다.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겠다고. 그리고 대학을 다시 들어가겠다고.


나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 말은 현실이 됐다. 민이 씨는 따박따박 나오는 수백만 원의 월급을 버리고, 퇴사 욕구 꾹꾹 누르게 해주는 보너스도 버리고, 정년이 보장된 미래도 버렸다. 아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기에 포기했다가 맞겠다. 대학을 다시 가겠다는 말은 수능을 다시 치겠다는 말이다. 민이 씨는 기숙학원을 등록했다. 서울의 기숙학원은 돈을 줘도 못 들어갔다. 나이 제한이 있었다. 인생의 첫 고난으로 '재수'를 맞이한 스물의 애송이들과 세상만사 천지분간 사회생활 진허게 겪은 서른여섯의 민이 씨가 한 교실에 앉아 비문학을 공부하는 그림이 쉽사리 그려지지 않긴 했다. 민이 씨는 포기하지 않고 전국 팔도를 뒤져 본인을 받아주는 기숙학원에 등록했다.   


남편은 틈날 때마다 민이 씨에게 카톡을 보냈다. 계속 1이 없어지지 않다가 한 달 만에 답이 왔다. 기숙학원에서는 폰을 반납해야 했다고. 아니 요즘은 군대도 폰을 주는데 어떻게 한 달을 참았지. 유튜브도 인스타도 안 보고 어떻게 한 달을 참냐고. 나는 절대 못해. 돈 줘도 안 해. 거의 고문 수준 아니냐. 민이 씨 대다나다. 다시 봤어 민이 씨. 그렇게 한 달이 두 달 되고 두 달이 세 달 되고 코로나로 미뤄졌던 수능까지 치르고 다시 한 달이 지나 성적도 나오고 발표도 나와 민이 씨의 입학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부장 얼굴에 사직서 딱 던지고 회사를 뛰쳐나오는 상상을 하지만 그걸 실행으로 옮기는 이는 몇 없다. 하던 일을 멈추고 새로운 영역으로 도전하는 이는 더더욱 없다. 민이 씨가 특출 나게 머리가 좋다거나 삼당사락의 성실함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민이 씨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본인에 대한 신용도 100%. 그게 나에겐 없고, 민이 씨에겐 있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이제는 안다. 점점 나이를 먹으며 사라지는 것. 평범한 루틴에 묻어가는 게 편해서 놔버리는 것. 그러다가 나른해질 만큼 익숙해지는 것.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 무서워지는 것. 그걸 민이 씨는 다 이겨냈다. 민이 씨는 마흔에 다시 신입사원이 된다. 코로나 때문에 입학 축하 파티는 못하지만 4년 뒤 졸업 축하 파티는 뻑적지근하게 해야지. 네 배로 축하하면서!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 아침엔 볼터치가 잘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