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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디짱 Jan 31. 2021

블링블링 핑크 라이트

정말 오랜만에 지하철을 탔다. 회사와 집이 지근거리라 걸어 다닌 데다 최근엔 퇴근 후 약속이 하나도 없었다. 친구 없다 놀리지 마라. 요즘은 안 만나는 게 미덕 아니겠나. 총 16개의 정거장을 지나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한 자리에 앉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앉은자리는 바로 임산부 전용석 맞은편 좌석이었다.

내가 사는 부산의 지하철 임산부 전용석은 만들어진 당시 전국에서 이걸 배우러 올만큼 혁신적인 시스템으로 평가받았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일단 보건소에서 나눠주는 임산부 딱지에 칩을 하나 심는다. 그 칩은 우리 눈엔 보이지 않지만 지하철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임산부가 지하철을 탄다. 전용석 가까이에 간다. 그럼 딱지 속 칩에 연계된 핑크색 등이 깜빡거린다. 임산부 여기 있어요!! 대신 말해준다. 모르고 앉은 사람은 민망해서 일어나게 하고, 임산부는 굳이 얼굴 붉히며 비켜주세요 안 해도 되는 시스템. 이 얼마나 혁신적인가.

지하철을 타는 40분 동안 그 자리엔 총 4명이 앉았다. 40대 여성 20대 남성 둘 40대 남성. 임신 초기엔 티가 안 날 수도 있고 오늘따라 임신부 배지를 안 들고 왔을 수도 있는데. 그 넷은 그렇게 보이진 않았다. 지하철에선 연이어 안내방송이 나왔다. 비워둬라 비워둬라 임산부석 비워둬라. 그 방송은 사람들의 에어팟에 맞고 튕겨 나와 객차 내에만 맴돌았다. 그 방송을 들은 사람은 나뿐이라고 착각할 만큼.

사실 핑크색 등이 반짝이는걸 한 번도 본 적은 없다. 임산부는 지하철을 잘 안타는 것일까. 다가오기만 해도 격렬하게 빛난다고 하던데. 아니면 빛나는 등이 부끄러워 못 타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임신이 유세냐며 소리치는, 유별나다 욕하는, 혹시나 있을 상황에 맞닥뜨릴까 봐 무서운 것일까. 어서 내가 임신을 해봐야겠다. 그 마음은 아무도 모른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데 한 번도 본적 없는 핑크 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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