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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디짱 Mar 01. 2021

90년대 배경 영화 속 그 사무실

"아니, 아직도 결재를 수기로 올린단 말이야?"

"응. 너희 회사는 전자결재지?"

"당근 말밥 아니야? 아니 이게 무슨 당근 말밥 시대에도 안 먹힐 소리냐?"

"좀 그릏긴 허지? 더군다나 새로운 것을 제일 중요시하는 회사에서?"

"왜. 그냥 봉수대에 연기 피워서 결재 올리지?"

"그거 괜찮네. 연기 한 번 피우면 반차, 두 번 피우면 연차."          


그게 바로 내가 다니는 회사다. 나의 회사는 '뉴s'를 다루면서도 그 외의 모든 것들은 매우 보수적이다. 사람도 보수적이고 집기도 보수적이고 생각도 보수적이다. 여기서 보수적이라는 말은 광화문 광장에 태극기 들고 얼싸안는 그분들의 보수랑은 좀 다르다. 정치적인 보수가 아닌, 변화를 극도로 싫어하는, 지금의 모든 것을 지키려고만 하는 그 보수다. 사무실은 전체적인 분위기도 낡아서 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기도 했다. 스크린에 펼쳐진 사무실을 보고 출근을 했는데 분위기만 낡은 게 아니었다. 그냥 사람도 다 낡았어.      


그 단적인 예가 수기 결재다. B4용지 절반 크기의 회색 갱지에 소속과 직급과 이름을 적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출장을 가던 연차를 쓰던 일단 그 종이에 검은색 볼펜을 이용해 정성스러운 글씨로 사유를 적어 부장에게 제출한다. 신입사원 때 파란색 볼펜으로 적었다가 빠꾸 당했다. 종이만 덜렁덜렁 낼 수 없으니 빳빳한 결재판에 종이를 끼워 제출한다. 그럼 부장이 이리저리 보고 부장 칸에 싸인을 한다. 그 옆으로는 부장의 상사들의 결재 칸이 있다. 종이는 쌓이고 쌓여 총무부로 향한다. 직원 5명, 10명 규모의 좋좋소도 아니다. 전자결재 시스템을 도입할 재원도 인력도 있는 회사다. 그저 지금의 안정을 바꾸기가 싫을 뿐.

          

그러던 찰나 한 차례 회람이 돌았다. 회람이라니. 공지를 쓴 종이를 차례로 돌려보는 게 회람이다. ㅋㅋ 여하튼 회람의 내용은 이제 우리도 정보화 시대에 발맞춰 전자결재를 도입한다고. 한 달간 적응 기간을 거쳐 본격 시행한다는 게 요지다. 이미 20년 전 신문에 기업이나 관공서에서 전자결재가 확산된다는 기사가 나왔었다. 수십 년이 늦은 시작. 회사의 고인물들은 귀찮게쓰리 왜 이런 걸 하냐고 투덜거렸지만 후배들은 그 고인물을 보고 역시는 역시라며 투덜거렸다.           


그리고 나는 그 새로 도입한 전자결재를 이용해 휴직을 낸 첫 사원이 됐다. 나도, 총무부도 처음이라 기안을 올렸다 취소했다 올렸다 취소했다를 반복했다. 도저히 힘들어서 못해먹겠다고, 토탈 10년의 세월을  정리하고자 퇴사를 결심하고 말했더니 휴직이 되었다. 2개월을 쉬게 됐다. 이 시국에 잡아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회사 그만두기 더럽게 힘들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지금은 아무 생각이 없다. 전자결재 프로그램에 들어가 내 기안 상세보기를 눌렀다. 동그란 '승인' 도장 여섯 개가 찍혀있다. 말만 전자결재지 부장과 그 윗사람들과 대면하며 얼마나 얼굴을 붉혔던가. 나는 이 전자결재 프로그램으로 퇴사하는 첫 사원이 될 것인가. 



우리회사 부뉘기 이런 부뉘기 ㅋㅋ 일단 블라인드는 딱 이 블라인드임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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