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디짱 Oct 25. 2021

금요일의 대성통곡

무슨 바람이 불어서였을까. 금요일 오후의 나는 할 일이 많았는데. 오랜만에 얻은 혼자만의 자유시간이었는데. 급 지하철을 타고 지도 앱을 종종거리며 그곳으로 향했다. 강남에서 올림픽대로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매번 지나쳤지만 한 번도 들리지 않은 곳. 2년 전 할아버지를 모신 곳. 1년 전 할머니도 함께 모신 곳. 국립현충원이었다.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아빠는 하늘도 두 손 두 발 든 효자였지만 5남매의 몫을 혼자 오롯이 지기엔 그 무게가 너무 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나이가 91세. 뇌출혈과 뇌졸중을 여러 번 거치며 그 후유증으로 약 6년을 누워계셨다. 진주 경상대병원, 사천의 자연요양원, 김해 보훈병원, 시내의 빌딩식 요양원, 동아대병원 등 누워있는 삶과 병에도 경중이 있어 몇 번이고 자의에 상관없이 이사를 다녔다.


내가 마지막으로 찾아뵌 건 시내의 요양원이었는데 나를 보고도 좋다 싫다 표정 없이 허공을 바라봤다. 그런 허공을 바라보는 할아버지가 그 방에만 8명이었다. 심지어 그런 할아버지 8명을 진찰하는 의사조차 할아버지였다. 할머니는 치매였다.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도 할아버지와 비슷했다. 콧줄로 유동식을 흡입하는, 비쩍 마른, 검버섯이 퍼진, 여느 요양병원서나 볼법한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이었다.


나는 외할머니 옥련씨는 심하게 좋아한 데 반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싫어했다. 며느리가 세명인데 둘째 며느리인 엄마만 고생하는 게 그들 탓 같았다. 용돈 한 푼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가정교육이니, 천자문이니 운운하는 게 고까워보이기도 했다. 정리가 안된 좁은 맨션은 깨끗하고 넓은 옥련씨의 집과 비교됐다. 요양병원에 누워있던 그들을 매일 찾아가 돌보는 것도 엄마 아빠뿐이었다. 마지막까지 왜 우리 부모만 괴롭히냐고 부모의 부모를 원망했다. 나는 어렸고, 지금도 어리다.


한 뼘 정도 될법한 유리 가벽 안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다. 혈색이 도는 얼굴로 양장을 차려입은 증명사진이다.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과 너무 달라 나도 모르게 엉엉 울어버렸다. 사진 밑에는 자와 자부, 사위, 손의 이름이 빼곡하다. 나는 세 번째 손이다. 장례식장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세 번째 손의 뒤늦은 대성통곡에 할아버지 할머니는 뭐라고 생각하셨을지. 금요일이 그렇게 간다.




현충원 충혼당에 올라가는 길 따라 하천이 굽이굽이


매거진의 이전글 고독한 도시락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