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련씨의 자가격리가 끝났다. 눈, 귀, 목, 어깨, 허리, 다리 통증 등으로 2020년을 오롯이 보낸 옥련씨는 음력 12월의 끝자락, 그러니까 설 연휴 전전날 코로나 밀접 접촉자가 됐다. 양력 2020년 액땜은 12월에 끝난줄 알았는데 음력 남았다고 이러기냐. 재수가 옴팡지게 없을지언정 이렇게도 없다니. 우라질놈의 코로나 같으니라고.
옥련씨는 한 달에 한 번 혈압약을 타기 위해 동네의 작은 내과에 간다. 그런데 딱 그 날 그 병원에 확진자가 다녀갔다고 했다. 그저 다녀간 것이었다면 옥련씨도 의사와 간호사처럼 코만 쑤시고 끝날 일이었지만, 그날따라 기운이 없던 옥련씨는 내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수액을 맞았다. 1시간 동안 마스크를 끼고 병원베드에 힘없이 누워있던 옥련씨의 옆 옆 옆 옆 옆 베드에서 확진자도 함께 수액을 맞았다. 확진자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 옥련씨는 영문도 모른채 보건소의 자가격리 안내 전화를 받았다.
그 누구보다 코로나 뉴스를 열심히 보던 옥련씨였지만 공무원 나으리의 전화 한 통에 그만 혼이 빠지고 말았다. KBS에서 매일 보았던 자가격리 수칙도, 코로나 대응법도 다 잊어버린 듯 무용지물이었다. 검사 결과 음성이 나왔는데 왜 격리가 되어야하는지, 혹시 병원은 가도 되지 않는지, 치료를 위해 의사가 왕진은 와도 되는지 나와 엄마를 붙잡고 물어보았다. 멘붕이 온 건 나와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옥련씨가 이미 5일 전 확진자와 접촉했다는데 그 사이 나와 엄마와 옥련씨는 더욱 밀접하게 접촉했기 때문이다. 함께 밥을 먹고, 자고, 부축했다. 그리고 우리는 직장과 시장을 다녔다. 외식은 한 번도 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옥련씨가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80번은 차렸을 설 차례상은 파토났다. 문어며 과일이며 장도 다 봤지만 차릴수가 없었다. 이게 머선 129의 연속이었다. 옥련씨와 평소 함께 지내던 나는 그 누구보다 빠르게 옥련씨의 집을 손절하고 엄마집으로 향했다. 역시 검은머리 짐승은 거두면 안된다더니 그 말이 딱 민폐손녀인 나한테 맞는 말이었다. 대신 엄마가 적장의 목을 베러 용감하게 직진하는 장수처럼 코로나 시끼의 목을 베러 옥련씨 집으로 들어갔다. 보건소에서 말한대로 집 안 공간을 단절시켜 마스크를 끼고 비닐을 끼고 옥련씨에게 끼니를 전했다. 옥련씨는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감옥같은 안방에서 기도만 할 뿐이었다. 어쩌면 감옥보다 더 한 것이었다.
남들은 매일 체온도 체크하고, 집에 잘 있는지 전화도 오고, 구호 물품도 보내준다 하던데 옥련씨에겐 첫 날 격리 안내 말고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옥련씨는 성실하게 방역 수칙을 지키면서도 이건 뭐 안 해도 되는데 그저 묵묵하고 미련하게 하고 있는건 아닌지 걱정했다. 혹시 자가격리 결정이 번복된건 아닌지 기대도 했다.
설이 지나자 담당 공무원이 손소독제와 쓰레기봉지와 체온계를 옥련씨 집 앞에 두고 갔다. 확진자와 접촉한 지 10일째였다. 먹을거리가 담긴 구호 물품은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뒤 왔다. 구호가 된건지, 호구가 된건지 살짝 헷갈렸다. 그것들을 먹을 새도 없이 코를 한 번 더 쑤시고 격리는 해제됐다. 즉석밥, 즉석 카레 등이 담긴 물품 꾸러미는 고스란히 민폐손녀가 차지했다. 딴 사람들은 스팸 받던데 왜 여기는 런천미트 주냐고, 누가 런천미트 먹냐고 민폐손녀는 옥련씨에게 물었다. 옥련씨는 자기가 너무 오래 살아서 이런꼴 까지 본다고 했다. 그 꼴이 리미트 없는 민폐손녀의 싸가지인지, 코로나 자가격리까지 하게 된 자신인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