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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디짱 Mar 10. 2021

할머니와 세 번의 학사모

옥련씨의 손주가 올해 대학에 들어갔다. 옥련씨의 동생과, 딸과, 손녀가 졸업한 대학과 같은 학교다. 스무 살이 된 손주는 옥련씨의 막내아들의 막내아들이라 11명의 손주 중에서도 상막내다. 한 일가의 대학 입시가 끝난 날, 옥련씨는 생애 마지막이 될 입학 축하금을 손주에게 전달했다.


옥련씨의 남동생은 상과대생이었다. 옥련씨보다 10살이 어렸다. 옥련씨는 결혼을 하고 부산에 터를 잡은 상태였는데, 깡촌에서 남동생이 대학에 합격해 부산으로 왔다. 당연히 돈이 없었고, 당연히 시집간 누이 집에 얹혀살았다. 스무 살의 처남을 옥련씨의 남편은 반겼다. 군식구라 눈치 준 적도 없었다. 오히려 좋아했다. 공부 잘해 좋은 대학에 다닌다며 처남은 뭘 해도 할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대학생들은 데모를 참 많이 했다. 가두시위 길목에 자리 잡은 옥련씨의 집에는 항상 남동생의 친구들이 버글버글했다. 누님 식은 밥도 괜찮으니 밥 좀 주이소. 무대뽀로 밀고 들어온 동생의 친구들까지 거둬먹인 옥련씨였다.


옥련씨의 딸은 공대생이었다. 딸은 학창 시절 공부를 잘했다. 대학 안 간 언니들과 달리 본인은 서울로 대학을 가겠다며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옥련씨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첫째 딸은 일찍 시집을 보냈고, 둘째 딸은 살림 밑천으로 아버지 가게를 도왔다. 셋째 딸은 집 가까운 대학에 보낼 심산이었다. 여식을 뭐한다고 서울로 보내냐는 마음이었다. 옥련씨의 남편도 같은 마음이었다. 딸은 결국 옥련씨 뜻대로 진학했다. 대학을 가서도 특출 났고, 졸업도 하기 전 서울에 있는 대기업에 취직했다. 엄마, 면접장 밖에서 순서 기다리는데 내 옆에 있는 애가 나한테 어디서 왔녜. 부산에서 왔다고 하니까 부산에도 대학이 있녜. 어이가 없어. 그러니까 왜 나를 서울로 안 보낸 거야 증말.


옥련씨의 손녀는 사회대생이었다. 교대나 사범대를 갈 줄 알았는데 그냥 일반 대학을 갔다. 뭘 하는 과인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서도 잘하면 선생이 될 수 있다길래 기대하고 있었는데 딸의 말을 들어보니 맨날 술 마시고 노는 데에 바쁘다했다. 그래도 옥련씨의 남편은 손녀를 좋아했다. 국립대 다녀서 효녀라고. 첫 등록금도 본인이 내줬다. 그런 손녀가 대학교 3학년이 됐을 때, 갑자기 옥련씨의 남편이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손녀는 빈 집에 홀로 있는 옥련씨에게 긴급 파견됐다. 옥련씨는 매일 울었고 손녀는 옆에서 같이 울었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잠을 잤다. 그러기를 2년여, 손녀가 타지로 취직해 집을 나가고 옥련씨는 다시 홀몸노인이 됐다. 아들딸이 자주 왔지만 손녀처럼 같이 살진 않았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손녀가 부산에 있는 대학을 다녔음에 감사했다. 그랬기에 같이 웃을 수 있었고, 같이 울 수 있었다.


옥련씨는 남동생의 졸업식에도, 셋째 딸의 졸업식에도, 손녀의 졸업식에도 참석했었다. 옥련씨는 대학도 나오지 않았는데 같은 학교 학사모를  번이나 쓰고, 꽃다발을 들고, 사진을 찍은 사람이 됐다. 올해 미대에 입학한 손주의 졸업식은 아마   없겠지.   있을까.   있을 때까지 산다는  못해도 4년은  산다는 건데. 그때까지 살아서  일인가. 라고 본인에게 되묻는 옥련씨였다.


출쵸는 연합이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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