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련씨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지어진 지 딱 20년 된 아파트다.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았지만 중소단지라 그런지 젊은 층을 찾기가 힘들다. 대신 노인이 많다. 노인 중에서도 할머니가 많다. 단지 놀이터에는 아이가 없다. 대신 놀이터 벤치를 점령한 꼬부랑 할머니는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부산 인구 5명 중 1명이 노인이니 그닥 놀라운 일도 아니다. 여튼 한 바퀴를 걸어도 300걸음이 안 되는 놀이터에서 할머니들은 서로의 굽어진 허리를 보며 뱅뱅 돈다.
할머니들은 살고 있는 동마다 무리를 이룬다. 옥련씨네 동에서는 옥련씨가 제일 나이가 많다. 저 건너편 동에는 92살 할머니도 있다. 이 동네 제일 왕언니다. 사실 91살 할머니도 있었는데 어느 순간 나오지 않더니 요양원에 갔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뿐이다. 매일 아침 아파트 현관 의자에 앉아 있는 87살 할머니는 효녀 딸 둘이 매일 할머니를 찾아온다. 그 할머니의 아들은 아산병원 의사인데, 아들에게서 돈을 받아 딸 각각에 3000만 원씩 수고비로 줬다고 한다. 시장 초입의 약국네 아들이 선에 나가 허탕을 친 이야기, 경로당으로 들어온 지원금이 넘쳐 추어탕 대신 삼계탕을 먹게 됐다는 이야기 등등은 다 놀이터 벤치에서 나누고 공유된다. 그리고 그 선봉에 옥련씨의 깐부, 16층 할머니가 우뚝 서있다.
한평생 가게와 절밖에 모르던 옥련씨가 집에 들어앉게 된 이후로 옥련씨는 동네 친구가 필요했다. 하지만 초내성적인 데다 남에게 다가가기 힘들어하는 옥련씨가 친구를 사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옥련씨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이가 바로 16층 할머니다. 16층 할머니는 옥련씨보다 3살 어린 동생으로, 교장으로 정년 퇴임한 남편이 죽고 10년째 홀몸노인으로 살고 있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동네 돌아가는 일에, 집집마다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너무 많은 16층 할머니는 흡사 정보과 형사처럼 모든 일에 귀를 쫑긋하고 다닌다.
16층 할머니가 정보를 모으는 과정은 이렇다. 일단 굉장한 환대를 바탕에 깐다. 아유 성님 손녀네. 아유 예쁘다. 옷은 또 어디서 이렇게 예쁜걸 사서 입었노. 상대는 살짝 해제된다. 16층 할머니는 그 틈을 타 살짝 본인 이야기를 얹는다. 임신했다면서. 축하한데이. 우리 손자며느리도 결혼한 지 오 년짼데 아직 애가 안 들어서네. 그럼 상대는 오잉 하고 귀를 기울이게 된다. 바로 그때 훅 치고 들어오는 본론. 근데 손녀 니는 뭐 한약 같은 거 먹었나? 애 들어서는 한약? 상대는 어버버 하며 대답을 절로 하게 된다. 이게 오늘 아침 엘리베이터에서 나눈 찰나의 대화였는데, 이런 식으로 16층 할머니의 정보 얻기 쓰리 스텝에 여러 번 당했다. 동네 할머니들도 어버버 하다가 대답한 이들이 많다고 옥련씨는 전했다.
리미트 없는 레이다망을 팽팽 돌리며 16층 할머니는 오늘도 동네 대소사를 캔다. 놀이터 벤치에 쪼롬히 앉아있는 열댓 명의 할머니들이 16층 할머니의 '뉴스'를 듣는다. 오늘의 뉴스에는 내가 먹은 애 들어서는 한약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걸 먹고 애가 들어선 건 아닌데. (ㅎㅎ) 문득 16층 할머니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옥련씨에게 물으니 들었는데 기억이 안 난다며, 김가 라는것 밖에 모른다고 했다. 나는 이제 16층 할머니를 김기자 할머니라 부르기로 다짐했다. 김기자 할머니의 특종을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