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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디짱 Apr 17. 2023

다음소희와 다음소디

그날이다. 프리미엄 월정액 해지의 날. 이사 오면서 바꾼 LG유플러스 인터넷 TV 결합 상품으로 3개월간 공짜 프리미엄을 누릴 수 있었다. TV를 거의 보지 않아 무용지물이었지만 공짜를 마다하진 않았다. 대신 해지는 분명해야 했기에 오전 9시 상담실로 전화를 걸었다. 상담원은 해지 대신 고급형은 어떻냐고 했다. 특별히 나에게만 3개월 할인 혜택을 주겠다 했다. 죄송합니다. 나는 제일 싼 베이직으로 선택한 후 전화를 끊었다.


내가 통화한 이는 소희였을지도 모른다. 소희.춤을 좋아하는 씩씩한 열여덟 고등학생 소희다. 소희는 특성화고에 다닌다. 졸업을 앞둔 소희에게 대기업에서 현장실습할 기회가 주어진다. 사실은 대기업의 하청이지만 선생님은 새로 뚫은 대기업 실습처라며 격려한다. 콜센터다. 소희는 그곳에서 나처럼 휴대폰이나 인터넷 상품을 해지하려는 이들을 상담한다. 이른바 해지방어팀이다. 


고객들은 화가 나있다. 해지를 막고자 전화를 돌리고 돌려 결국 소희가 받았기 때문이다. 죽은 아들의 요금제를 해지하려고 하는 부모도 있다. 욕지거리를 내뱉는  고객에게, 눈물을 흘리는 고객에게, 드러운 성희롱을 하는 고객에게 소희는 해지하지 말라며 다른 상품을 권한다. 실습생이라는 이유로 최저임금도, 인센티브도 받지 못한 채 밤까지 엉덩이를 붙이고 일한다. 여고생이 감당하기엔 과도한 콜 수, 벅찬 감정노동, 기댈 수 없는 어른. 소희는 그렇게 바스러진다. 


영화 ‘다음소희’는 2017년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갔다 극단적 선택을 한 여고생의 실화가 바탕이다. 주말 저녁 가볍게 틀었는데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가 사는 세상은 나만 사는 세상이었나 보다. 내 주위엔 특성화고를 졸업한 친구가 없다. 내 직장엔 대학을 나오지 않은 동료가 없다. 20살부터 꿈 대신 다른 것을 선택해 노동현장에 내몰리는 이들이 없다. 조언해 줄 어른이 있었고, 비빌 언덕이 있었고, 기댈 건덕지가 있었다. 소희에겐 없는 것들이었다.


대학교 1학년때, 과 선배가 나와 내 친구에게 어디 같이 가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성매매 여성들이 자립을 위해 쉬어가는 ‘살림’이라는 곳이었다. 엄마는 “너가 굳이 몰라도 되는 건 계속 몰라도 된다”고 했다. 나는 사실 조금 무섭기도 했고 용기도 나지 않았다. 엄마의 말은 갓 대학생이 된 딸을 걱정하는 의미였지만 나는  내가 살면서 평생 그들과 엮이지 않을 것이니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어렸다. 스무 살이었으니까. 소희도, 살림의 언니들도. 내 인생 바운더리 안에는 없겠지.라는 오만이었다. 


다음소희는 언제나 다음소디가 될 수 있다. 다음언니도 언제나 다음소디가 될 수 있다. 더 관심 갖고 더 귀 기울이지 않으면 다음은 언제든 대체될 수 있고 언제나 내가 될 수 있다. 미스터선샤인에서 일본군에게 위협받는 독립군 게이샤를 구한 애기씨처럼. 저 여인이 내가 될 수 있기에. 나만 사는 세상이 아니기에. 



영화 다음소희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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