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와 함께하는 후쿠오카 3
5년 만에 다시 온 일본이었다. 남편에게는 떵떵거렸지만 사실 일본어가 잘 생각이 안 났다. 비행기를 타고 가며 걱정했다. 나만 믿고 있을 텐데 어쩌지. 진 씨 둘이 나만 바라보고 있는데 어쩌지. 다 까먹었다고 말할까. 뽀록나기 전에 밝히는 거 쪽팔리는데. 공항에서 텐진 호텔까지는 택시를 불렀다. 와 우버가 되는구나. 후쿠오카에서 택시를 타는 건 처음이었다. 후쿠오카는 공항도 도심과 가깝고, 관광지 스폿마다 걸어 다녀도 무방했다. 우버 앱에 주소는 찍혀 있었지만 기사님은 재차 물었다. 도큐 스테이 텐진 쿠다사이. 텐진 미나미에키 킨죠데쓰. 오. 기억난다. 오 기억나. 와. 나의 뇌세포들아. 아직 괜찮구나. 많이 죽지 않았구나. 옆에서 느껴지는 눈길. 일본어 좀 치네. 으쓱. 사실 엄청 쉬운 건데. 후훗. 역시 아는 것이 힘이로구나. 권력이로구나.
텐진에 다다르니 텐션이 올라간다. 여행이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몇 년간 묶여있던 몸이었다. 코로나에 임신에 출산에 밧줄로 꽁꽁. 밧줄로 꽁꽁. 단단히 묶였었다. 그래 이 느낌이거덩. 집 떠나와 일부러 고생하는 이 느낌. 호텔 프런트에 섰다. 체크인 쿠다사이. 11시도 안 됐는데 해줄 리 만무하다. 어디로 가야 할까. 비가 안 온다면 오호리 공원의 호젓함을 느낄 참이었다. 하지만 날씨가 오락가락. 억수같이 퍼붓다가 그쳤다가를 반복했다. 일단 밥을 먹자. 근데 멀리는 가지 말자. 남편이 돈까스는 싫단다. 그러면서 호텔 바로 옆 건물 쿠시카츠 집을 말한다. 달리 선택권이 없다. 오픈하자마자 첫 손님이 됐다. 메뉴는 단 세 개. 세 개 다 시켰다. 왜냐면 우리는 돈 쓰러 온 관광객이니까!!! 막 쓰자!!!
아기는 설쳤다. 너도 신이 났구나. 쿠시카츠가 어디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교대로 밥을 먹는 정신없는 순간에도 느꼈다. 아, 밥이 너무 맛있다. 정확히는 쌀이 너무 맛있다. 주인장은 물었다. 온전히 흰밥으로 할래, 잡곡이 섞인 밥으로 할래. 혈당 치솟는 반질반질 윤기 나는 이 흰밥이 그리웠다. 아기도 밥과 국, 약간의 조림고기와 튀김으로 한 끼 뚝딱했다. 아기는 몇 번의 외식을 했었지만 항상 챙겨간 밥을 먹였었다. 그냥 밖에서 먹는 밥, 外食이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나도 내려놓는 연습을 했다. 이제 거의 두 돌이니까. 내가 만든 밥 말고도 먹어봐야지. 조미료도 먹어봐야지. 보온통에는 새벽에 만든 볶음밥이 있었다. 저녁엔 먹을 수 있으려나. 100%는 못 내려놓은 애미였다.
비는 계속 왔다. 텐진엔 기다란 지하상가가 있다. 한 7년 전에 혼자 여행 왔을 때 텐진 지하상가 서점에서 책을 샀었다. 마스다 미리의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라는 책 원서였다. 아기와 서점에 가보자. 유모차를 들고 지하상가 계단을 내려간다. 아기는 본인이 걷겠다며 떼를 쓴다. 뭐든지 신기하지. 이 계단도, 여러 개의 자판기도, 커다란 전광판도 아기에겐 처음이다. 그런데 지하상가가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서면 지하상가 분위기였는데 이제 메세나폴리스 지하상가 삘이다. 고급지네. 잘 정돈된 가게들이 줄지었다. 이내 아기는 흥미를 잃는다. 다리에 매달려 안아달라 한다. 걸어가도 걸어가도 서점은 보이지 않는다. 그새 없어졌나. 더위를 많이 타는 남편은 높은 습도에 땀이 줄줄이다. 띠링. 친구에게 톡이 왔다. 디쨩아 어디니.
친구 부부는 오늘 후쿠오카를 떠나는 날이었다. 우리는 시간이 되면 만나자 약속했다. 정말로 우린 후쿠오카 같은 하늘 아래 있었다. 남편에게 말하니 그걸 왜 이제 말하냔다. 난 분명 며칠 전에 이야기를 했었다. 시간이 되면 친구를 만날 거라고. 일촉즉발의 위기다. 사실 남편도 나도 아기도 쩔었다. 낮잠 때를 놓친 아기는 찡찡대고 정처 없이 걸으며 힘들었던 남편은 폭발 직전이었다. 근데 그걸 내가 건드린 것이다. 남편은 꼭 봐야겠냐고 했고 나는 그래도 약속했는데 어찌 안 보겠냐 했다. 말하면서도 직감했다. 아 싸우겠네.
일단 호텔로 돌아와 체크인을 했다. 친구에게는 비도 너무 많이 오고 아기 컨디션이 안 좋아 못 볼 수도 있겠다고 했는데, 친구는 우리가 있는 호텔까지 온다 했다. 미안하면서도 고마우면서도 힘든 마음이 공존했다. 일단 쩔어있는 남편에겐 자유시간을 줬다. 그러곤 친구 부부를 만났다. 같은 시기에 아이를 낳았다. 막상 만나니 너무 반가웠다. 서울 부산 떨어져 살면서 일 년에 한 번도 못 볼 때가 많았는데 여기까지 와준 마음이 몽글했다. 친구는 아이들의 커플 모자를 다이묘에서 샀다며 아기에게 씌워줬다. 30분도 채 못 있다가 비행기 시간 때문에 떠났다. 남편도 돌아와 간단히 인사를 하고 함께 배웅했다. 잠깐의 자유를 얻은 남편은 리프레시 됐다. 나도 친구 덕에 리프레시 됐다. 거짓말처럼 비도 그쳤다. 진짜 여행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