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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을 여름 Jan 01. 2024

저 진짜로 설거지하는 거 좋아해요.

일상의 소중함


1월 1일 새해 첫날이라, 가까이 사는 어머님댁에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실은 맛있는 냄새가 진동하고,

어머님은 무언가를 만드느라 분주하셨다.


우리 식구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 삼촌네도 도착했다. 모든 식구가 다 모이니, 어머님은 얼른 밥부터 먹자고 하셨다.


자식들이 온다고 어머님은 떡만둣국이며, 라이스페이퍼로 만든 만두며, 꼬리곰탕이며, 잡채며, 소꼬리갈비찜까지 푸짐하게 준비하셨다.


다 같이 큰 식탁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얘기하면서 또 하하 호호 웃으면서 이것저것 다양한 음식들을 맛보았다. 음식이 맛있다 보니, 한 그릇 먹고 또 리필하고, 아이가 남긴 음식까지 남김없이 싹싹 긁어먹었다.


식사가 끝나고, 나는 마지막에 먹은 음식을 다 씹지도 않은 채, 부랴부랴 주방으로 달려가 분홍 고무장갑부터 다. 고무장갑 끼고 싱크대에 자리 잡으니, 다들 이제는 그러려니 별말 안 하고 그릇들을 싱크대에 가져다준다.


오늘따라 이런저런 요리가 많다 보니, 크고 작은 그릇이며, 큰 냄비들까지 설거지거리가 한가득이다. 난 익숙하게 작은 그릇부터 씻어 식기건조대에 차곡차곡 올려둔다. 물기 잘 마르라고 똑같은 크기의 그릇끼리는 서로 겹치지 않는다.


설거지를 한참 하고 있는 데, 아직도 씻을 그릇들이 많은가 보다. 그릇들이 싱크대 개수대로 계속해서 쌓이고 쌓인다.

다들 그릇들을 가져다주면서 미안한지 한 마디씩 한다.


"오늘따라 그릇이 너무 많죠?"


아이 삼촌이 와서 나에게 얘기한다.


"나 설거지 좋아하잖아~ 괜찮아~"


이번에는 동서가 와서 한마디 건넨다.


"오늘 설거지 너무 많은데요?"


"나 진짜로 설거지 좋아한다니까~ 난 음식 정리하고 치우는 게 더 싫어~"


동서배려해서 난 소곤소곤 조용히 말을 건넨다.


이번에는 남편이 괜히 눈치가 보이고 불편한지 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말을 건넨다.


"오우, 설거지 너무 많지?"


"설거지하는 게 뭐 일인가?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지~"


남편한테 말 건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님도 나에게로 와 한마디 하신다.


"오늘은 설거지할 게 너무 많네~"


어머님도 오늘은 설거지거리가 많아 미안하신 모양이다.


"저 설거지하는 거 진짜로 안 싫어해요~ 이런 건 일도 아니죠~ 하나도 안 힘들어요~~"


휴, 설거지하는 보다 내 뒤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뜨거운 시선들이 더 부담스럽고 힘들다.




난 설거지하는 걸 좋아한다.

더 솔직히 말하면, 설거지하는 게 싫지 않다.

힘들지 않다.


내가 이런 얘기를 주변사람들에게 하면, 반응들이 다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설거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절대로 믿지 않는다.


심지어 나랑 한 이불 덮고 자는 남편조차도 내가 설거지하는 걸 좋아한다고 하면 믿지 않는다.


난 평소 어머님댁이나 시할머니댁가면, 설거지는 내가 도맡아 하는 편이다. 그래서 설날, 추석, 생일 등 가족 모임이 있을 때 음식을 다 먹고 나면, 난 후다닥 싱크대로 뛰어가서 고무장갑부터 낀다.


처음 몇 번은 서로 하겠다고 실랑이를 했지만, 10년째 싱크대 개수대 앞에서 고무장갑 끼고 있으니, 다들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나도 처음부터 설거지를 좋아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설거지하는 걸 안 좋아하니, 설거지할 때마다 설거지 내기나 가위바위보해서 설거지 당번을 정하는 데, 난 좀 그랬었다. 나는 설거지가 싫지 않으니, 굳이 내기를 하고 싶지 않았고, 그냥 내가 하고 말지라는 생각이 더 컸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설거지 당번으로 걸렸을 때, 그 좁은 개수대 앞에 어른 둘이 서서, 같이 설거지하는 모습도 보기 좀 그랬었다. 그때도 굳이 저렇게까지 불편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냥 내가 하고 말지라는 생각이 또 들었다.


아, 다들 설거지를 정말 싫어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 이후로 웬만해선 내가 먼저 싱크대 개수대 앞에 가서 고무장갑부터 꼈던 것 같다.


하지만 또 나 혼자 설거지를 도맡아 하면 다들 마음이 불편할 테니, 난 항상 이 말도 잊지 않고 꼭 해야 했다. 혹시라도 혼자만 착한 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듯하여.


"난  정말로 남은 음식들 정리하고 치우는 걸 잘 못하거든~그러니깐 설거지는 내가 할게. 상 치우고 정리하는 것 좀 해줘~"


이렇게 얘기해야 나도 그들도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내가 설거지를 싫어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니, 몇 가지 떠오른다.


첫째, 밥 먹고 배부르니 소화시킬 수 있어서이다.

둘째, 음식 먹은 즉시 설거지를 해야 그릇들이 잘 닦인다.

셋째, 경험 상 배부른 채로 앉아있다가 나중에 설거지해야지 했다간 정말로 하기 싫어진다. 몸이 무거우니 만사가 다 귀찮고, 개수대에 쌓여있는 그릇들이 아주 꼴 보기도 싫어진다.


이러한 표면적인 이유로 설거지는 먹은 즉시 내가 도맡아 했고, 설거지를 싫어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요즘 들어 설거지를 싫어하지 않는다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설거지를 좋아한다고 자주 말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백이면 백, 다들 믿지 않기에

나는 왜 설거지를 좋아할까에 대하여 근본적인(?), 근원적인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이유를 왠지 알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어렸을 때 살던 집은 뜨거운 물이 잘 나오지 않았다. 보일러를 고치면 한동안은 뜨거운 물이 나왔지만, 물을 틀고 한참을 기다려야 뜨거운 물이 나왔고, 온도 조절이 안되어 데일 것처럼 뜨거운 물을 찬물과 섞어 온도를 맞춰야 했다.


설거지도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집에 계실 땐 우리한테 시키지 않아 설거지를 많이 하진 않았지만, 엄마가 안 계실 땐 내가 먹은 음식을 정리해야 했기에, 데일 것처럼 뜨거운 물은 세제 묻힐 때만 쓰고, 헹굴 때는 차가운 물로 했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도 싫지만, 무섭도록 뜨거운 물은 고무장갑을 끼고 있음에도 정말 고통스러웠다.


이마저도 보일러가 멀쩡했을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보일러가 고장이 나면, 우리는 씻을 때도 큰 들통에 찬물을 받아 가스레인지에 올려 팔팔 끓여야 했다. 들통의 뜨거운 물과 화장실 고무대야에 있는 찬물을 섞어가며 씻곤 했다.

뜨거운 물이 귀하니, 뜨거운 물은 조금, 찬물은 많이 해서 차갑지 않을 정도의 미지근한 물로 씻었다.


그렇게 살다가 결혼을 했는데, 비록 신혼집은 좁고 보잘것없었지만, 뜨거운 물만큼은 콸콸 나오고, 방바닥도 뜨끈뜨끈하니 더 바랄 게 없을 정도로 행복하고 감사했다.


아마도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설거지할 때마다 속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을 늘 했고, 가끔씩은 입 밖으로 내뱉기도 했다.


'뜨거운 물도 잘 나오는데, 설거지가 뭣이 힘드냐고~ 이렇게 뜨거운 물이 나온다는 거에 감사해야지~'


하고 말이다.


지금은 신혼 때보다 훨씬 더 좋은 집에서 살고 있으니, 나는 매일매일 우리 집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누가 듣든 안 듣든 외출 후 집으로 들어왔을 때나, 설거지를 할 때 혼잣말로 습관처럼 하는 말이 있다.


"우리 집 너무 좋지 않아? 우리 집 너무 좋다~"

"설거지는 뜨거운 물만 있음 힘들 게 하나도 없어!"

"이렇게 뜨거운 물 잘 나오는 데 설거지가 뭣이 힘드냐고~"


사람은 자고로 가난해봐야 하고 힘들어봐야 되나 보다. 그래야 지금 현재가 얼마나 감사한 지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요즘 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관리비가 많이 나온다. 난방 한번 안 켜고, 안 쓸 땐 전기코드도 다 뽑아가며 절약하는 데 우리 집 관리비는 매년, 매달 오르고 있다. 남편은 관리비 고지서를 찬찬히 훑어보더니, 급탕비가 많이 나와서라고 한다. 그러면서 나에게 다가오더니 귀에 대고 속삭인다.


"범인 찾았어~ 급탕비 범인! 바로 지금 화장실에서 나올 생각하지 않고 뜨거운 물 낭비하고 있는 울 아들이야~ 크크."


나를 보며 실실 웃는데, 난 억지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


'여보~ 사실은 나 설거지할 때 뜨거운 물 많이 쓰거든~ 목욕할 때도 그렇고~~'


라고 차마 그 급탕비 범인이 나라고 말하지 못했다.

타이밍을 그만 놓쳐버렸다.


설거지할 때 뜨거운 물은 포기하기 힘들지만, 급탕비에 예민해진 남편 눈치를 당분간은 좀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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