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의 연인
나는 꿈이 참 얍삽한 자식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그니까 적어도 오전부터 밤까지의 시간 동안은 나는 헤어진 그 사람을 잊을 수 있다고 자부한다. 그와 자주 걷던 거리는 일부러 피해 다른 길로 돌아가고, 추억이 있는 노래가 들리는 일이 없게 외출할 땐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편지와 사진은 미련 없이 휴지통에 직행하고, 그가 해준 참 맛있었던 음식은 그 음식을 잘하는 맛집에 찾아가 배 터질 때까지 먹는다. 유치하지만 다른 맛으로 덮어버리는 거다. 나는 헤어지면 매번 이런 ‘짓’을 해왔다. 그래서 꿈이 싫은 거다.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그 사람 생각을 막으려고 이렇게나 노력하는데, 꿈이라는 자식은 단번에 그 노력을 무색하게 만드니까.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마치 내 몸을 옴짝달싹도 못 하게 묶어 두고, 우리가 행복했던 추억만 꼽아 무한 반복으로 틀어주는 영화 같다. 잠에서 깨야만 종료 버튼이 간신히 눌리는. 한번은 그가 사귈 당시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는 꿈꿀 때, 흑백으로 꿔? 컬러로 꿔?” 생각해 보지 못한 질문에 호기심이 동했다. 그리고 꿈을 되짚어 봤다. 그 당시 내 꿈은 온통 흑백이었다. 역사책에 나오는 흑백 사진들 같은 풍경. 내가 흑백 꿈을 꾼다고 말하자 그가 답한다. “진짜? 나도 흑백. 근데 신기한 게 깊게 잠들지 못하면 대부분 컬러 꿈을 꾼대.” 그의 말에 ‘아, 우리 잘 자고 있구나’ 하며 웃어넘겼다. 별 대수롭지 않았던 저 순간이 새삼 떠오르는 건, 요즘 내가 컬러 꿈을 꾸기 때문일 거다. 그 애가 자주 쓰던 모자의 오렌지색이 눈에 띄는 선명한 꿈. 나는 이런데 그는 어떨까. 나에게 흑백 꿈과 컬러 꿈에 대해 말해주던 그는 과연 무슨 색 꿈을 꾸고 있을까. 잠깐이라도 컬러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 애가 여전히 깊게 잠을 잔다면 내가 좀 비참하니까. 아니, 그 애 꿈에 내가 나오긴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