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글 Sep 22. 2018

무책임하다는 이유로

헤어진 우리의 관계

살면서 누구나 무책임한 순간들을 겪는다. 밥을 먹고 설거지를 안 한다거나, 길 가다 쓰레기를 몰래 버린다거나, 갑자기 내일 입고 싶은 옷이 생겨 새벽에 세탁기를 돌린다거나 하는, 어쩌면 사사로운 일들. 차라리 이렇게 단편적으로 끝난다면 다행이다. 나의 오랜 고질병은 관계에서도 무책임하다는 것. 말 나온 김에 나에 대해 몇 자 더 적어보면 열정 없고, 활기 없고, 그래서 아주 무미건조한 사람. 이런 나도 사랑은 했다. 건조 오징어도 불에 구우면 뜨거워 몸을 말듯이 나도 감정은 있으니까(건조한 사람이 치는 개그는 이렇다). 애인을 사랑하고 그래서 행복하다가도 나에게 얹히는 책임감이 부담스러워, 끝은 항상 생뚱맞게 고하는 이별이었다. 물론 그런 이별마저 친구와 놀다 헤어지는 길에 가볍게 “안녕” 건네듯이 아주 덤덤했다. 이별을 당한 상대들은 왜 그러냐며 이유를 찾기 바쁘다. 난 그럴 때마다 뭐라 답해야 할까, 무책임한 사람답지 않게 잠시 고민하곤 하는데 한 가지 분명한 건, 무책임이 튀어 오르는 시기는 상대가 더는 궁금하지 않을 때라는 거다. 관계에 대한 부담감이 상대에게 가졌던 호기심을 잠식해버리는 그쯤. 그 시기가 남들보다 빠를 뿐이다. 무심코 헤어진 애인의 수를 손가락으로 헤아려보다, 세 번째 손가락에서 머뭇거렸다. 그는 내게 헤어짐의 이유를 묻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는 게 많았고, 글을 잘 썼으며, 스타일까지 좋았다. 그가 쓰는 글이 좋아 편지를 써달라 조르면, 다음날 편지를 건네오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다.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 그를 닮고 싶었다. 그런 그와의 관계에서도 나의 고질병이 스멀스멀 끼어들어, 여느 때처럼 덤덤한 이별을 고했다. 그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러곤 미련 없이 떠났다. 지금도 그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지 않다. 왜 나에게 이별의 이유를 묻지 않았는지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 무책임과 무관심에는 굵직한 상관관계가 있으니까. 다만 내가 아쉬운 건, 그가 건네는 편지글을 더는 받아보지 못한다는 것. 아마 난 뼛속까지 무례한 사람인가 보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라고 다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