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쓰기
뭐든 바닥에 닿고서야 만져지는
그런 곳이 있었다
흩어진 일기장과 스케치북 파편들
하얗게 끈적이는 우유 방울
풀썩거리는 겨자색 니트
그리고 스러져버린 사소한 것들
바닥은 아무래도 딱딱하니까
쨍하는 소리가 울려도
제까짓 것들은 너무 멀리서 출발했고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게 부서진 유리병은
바닥을 훔칠 때나 패인 자국으로
짐작만 한다
소리가 아무리 요란하게
방을 가득 채워도
시간 따위는 눈만 깜빡하면 얼마든지
앞지를 수 있다
중력이 거꾸로 흐르는 여기서 나는
창문에 끝없이 부딪히는
날개가 젖은 파리
위로 열한 칸, 오른쪽으로 세 칸
천장 높이는 11미터
공중에 매달린 이곳과 나는
뿌연 먼지처럼 닮았다
바닥에만 닿지 않으면
서로 묻을 일도, 뭉갤 일도
없다
얇게 쪼개지며 반짝이는 바닥을
머뭇거리며 흘겨볼 때
고개를 갸웃하던 바람이 몇 번이고
모른 척 지나갔던걸
아직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