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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긋 Aug 21. 2023

21.08.19 오늘의 풀무질

휴가를 다녀왔다.

휴가를 다녀왔다. 썩 길지 않은 시간이나마 잠시 풀무질에서 놓여있기 위한 휴가였지만 그나마도 놓여있지 못했다. 8일 중 4일은 이런저런 연락이 들어왔고, 나머지 4일은 고민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풀무질이 안온한 공간으로 남아있기에는 그 바깥이 너무 드세다. 이제 나름 풀무질에 무릎까지는 파묻었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풀무질이 선 땅이 온통 파헤쳐져 앙상히 드러난 내 정강이가 떠올랐다. 아직 발목도 미처 못 묻은 모양이다.


간신히 얻어낸 휴가를 온통 휘청거리는 기분으로 보냈다. 내가 없는 풀무질을 상상하며, 돌아갔을 때의 업무량을 상기하며, 그리고 여전히 불안할 것만 같은 풀무질의 다음을 고민하며 그렇게 보냈다. 나는 꽤 못된 버릇이 있는데, 때론 지나쳐도 되는 뿌리를 붙잡고 놓지 못한다. 이를테면 풀무질의 지속가능성을 고민할 때면 꼭 '지속가능성이란 무엇인가?' '풀무질이란 무엇인가?'를 붙들고 낑낑댄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 휴가는 저 두 질문에 얹어 '점장이란 무엇인가?'까지 붙들고 혼자 뒹굴거렸다. 답이 나오는 질문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지만, 그래도 놓지 못하는 건 여전한 강박이다.


그래서 점장이란 무엇인가? 풀무질을, 혹은 풀무질이 떠난다면 '점장'이라는 직함은 내게 무엇으로 남는가? 두려워졌다. 내가 그간 돌렸던 조그만 명함이 휴지조각이 되고, 나를 설명할 말이 허깨비가 되고, 한없이 가벼워질 초라한 내가 두려워졌다. 세상의 시선과 기준들이 나를 다시 사로잡았다. 갑자기 나를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가 느껴졌다. 너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외침이 귀를 울렸다. 간신히 버텨내고 있는 풀무질이 견딜 수 없이 무서워졌다.


그래서 다시 한번, 점장이란 무엇인가? 풀무질을 관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휘청이는, 꽤 낡아버린 풀무질을 떠받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무슨 마음이어야 하는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나를 휘감는다. 그걸 가지고 복귀했다. 밀린 업무를 쳐내고 책을 들이고 정리했다. 나 없는 새에 진행된 일들을 따라잡았다. 상황을 파악하고 다시 한 발 나가기 위한 회의를 했다. 그럼에도 떨쳐낼 수 없는 질문들이 등에 매달려있다. 휴가가 남긴 이번 질문들은 꽤 오래 갈 듯하다. 풀무질에서 떨어져 있어보니 알게된 질문들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풀무질에 처음 발을 들일 적에는 무엇때문이었더라. 대충 같이 살아내고 싶다는 말 때문이었던 듯 싶다. 함께 살고 싶다는 말, 그 말이 여기에 나를 묻고싶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다시 생각하니 엄청 멀리 느껴지는 말이다. 너무 요원하지 않나 싶다. 당시의 결연했던 나도 겁나고, 지금 멀리 느끼는 나도 겁난다. 모든 것이 너무너무 겁나면 도망칠 수도 있겠지. 근데 아직은 아닌가 보다. 지금은, 그래, 아주 약간 용기를 잃었을 뿐이다. 조금 겁이 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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