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의 ‘회색 코뿔소를 보라’

호세의 '안전하다는 착각'

by 호세

거대한 코뿔소 한 마리가 들판을 가로질러 천천히 다 가온다.

숨소리가 낮게 들리고, 땅이 진동하는 듯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너무 평화롭다. 누군가는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바라보고, 다른 이는 휴대폰 화면에 몰두한 다. 코뿔소는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는데, 아무도 긴장하 지 않는다. 이 장면은 허구가 아니다.


경제학자 미셸 부커(Michele Wucker)가 말한 '회색 코뿔소(Gray Rhino)'는 충분히 예측 가능하지만 대처를 미루다 결국 큰 충격이 되는 위기의 은유다. 검은 백조 (Black Swan)가 예측 불가능한 돌발 사태를 의미한다면, 회색 코뿔소는 모든 징후가 명확히 보이는데도 무시되는 위험을 뜻한다. 코뿔소가 바로 앞까지 왔을 때 비로소 사람들은 뒤늦게 소리치며 달아나려 한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현대 사회의 안전 관리에서 회색 코뿔소는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치명적인 위험 유형이다.


산업재해의 80% 이상이 사전에 충분히 예측 가능했던 상황에서 발생한다 는 통계가 이를 뒷받침한다. 우리는 위험을 보고도 왜 눈을 돌릴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회색 코뿔소를 제때 막아 낼 수 있을까? 한국 사회에서 회색 코뿔소는 익숙할 만큼 자주 출몰 한다. 건설 현장에서 안전모를 쓰지 않고 고소 작업을 하 는 장면, 출근길을 서두르는 인파 사이를 무리하게 파고드는 오토바이, 한두 번 경고음이 울렸지만 무시된 기계 결함, 정기 점검이 연기된 채 가동되는 노후 설비들. 이런 이상 징후는 사전에 분명히 모습을 드러낸다. 제조업 현장에서는 더욱 구체적인 사례들을 찾을 수 있다.


케이블 제조 공정에서 압출기의 온도가 설정값을 벗어나는 알람이 하루에 3-4차례 울린다. 처음엔 담당자 가 달려가 확인하지만, 며칠 지나면 '또 저 소리 네' 라며 무 감각해진다. 절연체 두께 측정 장비의 센서가 먼지로 오염되어 부정확한 값을 표시하지만, 생산 일정에 쫓겨 청소는 계속 미뤄진다. 작업자들은 보호복이 찢어진 채로 화학물질을 다루면서도 '오늘만 이렇게 쓰자'라고 말한다. 이런 상황들이 반복되다 어느 날, 무너진 교량 아래로 차량이 추락했고, 멈춘 엘리베이터에 갇힌 사람이 구조 요청을 외쳤다. 압출기 과열로 화재가 발생했고, 불량 케이블로 인한 합선 사고가 일어났다.


회색 코뿔소가 돌진해 온 뒤에야 우리는 사건 이름을 달고, 애도를 표하며, 재발 방지 대책을 이야기한다. 개인적 위험 인식의 문제를 넘어, 조직 차원에서도 회 색 코뿔소는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안전 교육 참석률이 해마다 감소하는데도 형식적인 서류 정리에만 매달리는 안전팀, 사고 발생률 통계를 조작해 상급 기관에 보고하는 관리 부서, 예산 절감을 이유로 필수 안전장비 교체를 계속 연기하는 경영진의 결정들이 그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조직적 무관심이 작업자들의 안전 의식마저 마비시킨다는 점이다. '회사에서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데 우리가 뭘 해봤자'라는 체념이 퍼지면 서, 개인 차원의 안전 행동마저 소홀해진다. 이렇게 개인과 조직의 안전 불감증이 맞물리면서 회색 코뿔소는 더 욱 거대해진다.


회색 코뿔소를 외면하는 첫 번째 이유는 익숙함이 만 든 무감각 때문이다. 늘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는 일상 속 경고는 배경음처럼 희미해진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습 관화(Habituation)' 현상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민감하 게 반응하던 자극도 반복되면 점차 무디어지는 것이다. 오전 회의에서 늘 지적되는 '현장 내 보안경 착용'은 곧 잔소리가 되고, 기계에서 간헐적으로 나는 잡음은 곧 ' 원래 그러려니' 하는 소음으로 변한다. 작업 현장의 위험 요소들이 매일 반복되면서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진다. 익숙한 경고는 우리 눈을 흐릿하게 만든다. 이런 무감각은 '확률 무시 편향(Probability Neglect)' 과도 연결된다. 사고가 일어날 확률이 낮다고 인식되면, 그 결과가 아무리 치명적이어도 대비를 소홀히 하게 된 다. '지금까지 별일 없었는데 앞으로도 괜찮겠지'라는 생 각이 바로 이런 편향의 결과다.


- 호세의 '안전하다는 착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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