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목소리

호세의 '안전하다는 착각'

by 호세

오늘은 보고서를 쓰러 온 게 아니라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는 것을, 내 스스로도 잊지 않으려고 했다. 안전 담당 자라는 직함이 붙으면 대개 "규정 준수"라는 세 글자가 가장 큰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목 소리가 현장의 속삭임들을 덮어버린다는 사실을 깨달았 다. 내가 APAC HSE 리더로 일하면서 가장 큰 깨달음은 안전이란 결국 사람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파리 본사에서 내려오는 글로벌 안전 기준도 중요하지만, 청주 공장 현장에서 울려 퍼지는 진짜 목소리들이 더 절 실했다. 그래서 오늘은 서류철을 접어 두고, 사람들의 숨 소리가 섞여 나오는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첫 이야기는 용접 작업대 옆에서 시작됐다. 오전 9시, 아직 작업복에 땀 냄새가 밸 시간은 아니었다. 마스크를 벗은 강기사님이 마른 입술을 혀로 훑으며 말했다.

"보안경에 김 서리는 거, 누가 좀 해결해 줬으면 좋겠 어요." 그의 손끝은 문득 떨리고 있었다. 20년 넘게 용접봉을 잡아온 손이었지만 여전히 떨렸다. 불꽃을 오래 바라본 탓인지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강기사는 보안경에 안개 가 차면, 시야를 확보하려고 순간적으로 마스크를 밀어 올린다고 털어놓았다. 그 몇 초가 눈을 뜨겁게 삶는다. "처음에는 참았어요. 그런데 정밀 작업할 때는 정말 안 보여서... 위험하단 걸 알면서도 벗게 되더라고요."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우리가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 진 규정을 만들어왔는지 돌아봤다. 회사는 '개인 보호구 착용'이라는 규정을 강조했지만, 그 규정은 김이 서려 앞 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그를 보호해 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를 규정 위반자로 만들었다. 나는 노트에 조용히 메모했다. '착용'보다 '사용'이 먼 저 편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강기사님이 덧붙였다. "신입 애들한테는 절대 벗지 말 라고 하는데, 정작 저도 벗고 있으니 뭐라 할 말이 없어요. 미안하죠, 선배로서." 그 순간 나는 안전 문제가 단순히 개인의 의식 문제가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시스템이 사람을 배려 하지 않으면, 사람도 시스템을 지킬 수 없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후배들에게 전달된다.


두 번째 이야기는 포장 라인 끝 작은 휴게실에서 이어 졌다. 막 교대를 마친 김씨가 플라스틱 의자에 털썩 주저 앉으며 손바닥을 펴 보였다. 피부가 종이 테이프 자국으 로 얼룩져 있었다. 붉은 선들이 마치 지도의 등고선처럼 손가락 사이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손보호필름 있잖아요? 이게 작업 중에 자꾸 벗겨져서 그냥 맨손으로 일했어요." 그녀는 웃음을 섞어 이야기했지만, 웃음 끝에서 피로 가 묻어났다. 김씨는 3년째 포장 라인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루 8시간 동안 끊임없이 손을 움직이며 케이블을 포장 하고, 테이프를 붙이고, 라벨을 부착한다. 한 시간에 평균 150개의 제품을 처리해야 한다. "보호필름이 벗겨지면 작업 속도가 떨어져요. 다시 붙이려면 시간이 걸리고, 그러면 목표량을 못 채우게 되죠. 그래서 그냥... 참고 했어요."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안전장비의 근본적인 딜레마 를 생각했다. 보호장비가 작업 흐름을 방해하면,


사람들은 장비 대신 편안함을 택한다. 아니, 정확히는 생산성을 택한다. 우리는 '규정 위반'이라고 말하기 쉽지만, 사실 시스템이 사람을 배제한 순간부터 규정은 종이조각에 불 과하다. 나는 다시 메모했다. '장비가 작업을 따라가야 규정이 살 수 있다.' 김씨가 물 한 모금을 마시며 계속했다. "사실 말하기도 좀 그랬어요. 투덜거린다고 생각하실까 봐. 그냥 제가 참 으면 되는 일인 것 같아서요." 이 말이 가장 아팠다. 안전 문제를 개인이 감내해야 할 몫으로 여기는 문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먼저 바 꿔야 할 것이었다

- 호세의 '안전하다는 착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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