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아이들에게 한글 가르치기
우리 부부는 이민을 오면서부터 다짐한게 있다.
아이들에게 무조건 한글을 가르친다.
한국사람이라면 한국말 하는게 당연하지만, 캐나다에 사는 많은 한국 가정이 한국말보다는 영어를 잘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니 집에서 엄마아빠가 안되는 영어로라도 아이들과 영어로 대화를 하라고.
이 말에 반문하자면,
'캐나다 살면서 캐나다에서 초중고 다니는데 영어를 못하는 아이들도 있나?'
영어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사용하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6시간이면 충분하다. 충분히 알아듣고, 충분히 말할 줄 알며, 충분히 쓸 줄 알고, 충분히 읽고 이해한다. 그 충분히 라는 시간에 구지 집에서까지 충분히를 얹을 필요는 없다. 언제나 문제는 한국어이다.
한국말을 잘하는건 어렵지 않다고들 한다. 한국 예능 프로그램을 주구장창 틀어주면, 영어만 쓰던 아이들도 그렇게 빠르게 한국말을 잘 할 수 없다고. 한국 드라마, 영화를 아이랑 같이 앉아서 보다보면 한국말은 금방 잘한다고. 나는 욕심이 많은 엄마라, 한국말을 잘하는걸로는 성에 안찬다.
내가 아이에게 쪽지를 남겨놨는데 아이가 영어로 답장을 써놓는건 보기 싫다.
이것이 우리부부가 한글을 가르치는 이유이다.
캐나다에서 한글을 가르치는 방법은 참 많고,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은 나라에서 운영하는 한글학교에 보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한국에서 학습지를 잔뜩 주문해다가 풀리기도 한다. 또 내가 본 어떤 가정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좀 있는지 여름방학마다 아이들과 한국에 방문하며 농담반 진담반 '한국어 가르칠겸 한국으로 잠시 유학간다'고도 한다. 방법은 많지만 아이들이 한글을 끝까지 떼고, 잊지 않고 살아가게 하기 위해선 결국 부모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수 밖에 없다.
한글떼기.
아이가 어디까지 할 줄 알아야 한글을 뗐다고 말할 수 있는지 참으로 난해하다.
학습지 한권을 다 끝냈다고 한글을 뗐다고 할 수 있는지. 한글학교에서 내준 숙제를 잘 하면 한글을 뗐다고 할 수 있는지 말이다. 어디까지를 기준으로 봐야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이가 한글책을 꺼내 막힘없이 줄줄 읽고, 엄마에게 스토리를 이야기 해줄 수 있고, 독후감까지 쓸 수 있다면 한글은 뗐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기준이라면 우리집 첫째와 둘째아이는 한글을 떼었다.
우리집 두 아이의 경우엔 특별한 학습지 없이 스케치북과 색연필, 그리고 글자자석으로 한글을 가르쳐주었던 기억이 난다. ㄱ부터 ㅎ까지, ㅏ부터 ㅣ까지 스케치북에 써주고, 아이들이 따라쓰고, 글자가 가지고 있는 소리를 알려주고, 받침이 붙었을 때의 소리를 알려주니 어느순간 깨달은 아이들이 스스로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고, 자석칠판에 여러 글자를 만들어보며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는, 글자가 적게 들어있는 책을 꺼내 한글자씩 읽어보게 해주었고, 받침이 있는 글자든, 없는 글자든 상관하지 않고 소리나는 대로 글자 읽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이후로는 조금 더 빠르게 단어를 읽게했고, 그 이후로는 띄어쓰기와 느낌표, 물음표를 보면서 문장읽는 법을 알려주었다.
어느정도 글을 속도있게 읽기 시작하자 빈 노트를 한권 주고 그곳에 내가 불러주는 아무 문장이나 받아쓰는 받아쓰기연습을 시켰다. 처음엔 단어를 불러주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문장을 불러주었고, 더이상 내가 지어낼 문장이 생각나지 않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받아쓰기 교재를 한권 사다가 1주일에 2쪽정도 해나갔다. 그렇게 첫 아이가 문장을 써내려가자 이번엔 다시 처음부터 둘째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방식은 같았다. 다행히도 첫째와 둘째가 무난하게 잘 따라와 주었고 이제 마지막.. 막내만 한글을 가르치면 끝나는 상황이다.
문제는 막내아이에게 있었다.
ADHD는 아닌데 왜이리 산만한건지. 왜..!! 10번을 말해줘도 한번을 기억을 못하는건지.
왜..?? 20번을 말해줬는데도 한번을 기억을 못하는건지. 10번을 더 알려줘? 하다가 내 속이 뒤집어 질 바로 그때 쯤. 나는 두 손을 다 들었다. "남편아.. 이제 당신몫이다. 두명은 했으니 한명은 당신이 하렴."
그렇게 나는 남편에게 막내아이의 한글교육에 대한 몫을 조용히 넘겨주었다.
조용한 첫째 둘째랑 다르게 유난히 활달한 막내녀석을 보며 남편도 쟤는 또 다른 녀석이네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 막내를 이해하기 위해 남편은 몇 달간 유튜브며 책이며, 자신이 찾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찾아보던 중이었다. 그러다 아들연구소에서 발간한 '아들의 한글'교재를 구입했다. "이거다!" 싶었다고 했다. 다행히 남편의 노력은 지금 한껏 빛을 발하는 중이다.
"아빠아빠! 한글공부 해요. 공룡카드 더 받아야 해요."
아빠랑 아들이랑 공룡이름쓰기가 한창이다. 빈칸에 공룡이름을 써 넣고 미션을 통과했다며 스티커를 하나씩 붙여 나가고, 마지막엔 빈 종이에 앞에서 배운 공룡이름을 안보고 쓰는거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무슨 한글공부를 저렇게 요란하게 시키나 할 만큼.. 막내아이는 한번에 글자를 적지 못할까봐 안절부절 하고 있고, 아빠는 공룡카드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하고 있고.. 나는 그런다고 한글을 뗄 수 있어?? 하는 생각 뿐이다.
막내는 한글자 한글자 여러번 생각하더니 결국 한번에 공룡이름을 제대로 적었다. 그리고는 아빠에게서 짜잔! 너 이번에도 성공했구나! 하는 폭풍칭찬과 함께 공룡카드 한장을 자랑스레 건네받는다.
도대체 이 공룡카드가 5살 난 막내아들한테 무슨 의미인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누나형아는 용돈을 받을 때 너는 형아누나는 가지고 있지 않은 공룡카드를 받지 않느냐는 한마디에 금세 어깨 쫙 피고 당당해지는 아이를 보고있자면 더욱이 모르겠다.
아들, 너에게 공룡카드는 무슨 의미니??
그런데 사실은, 그 의미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저 이렇게라도 한글을 쓰고 있는 너가 엄마는 너무 기특한걸!
처음 며칠과 다르게 공룡카드를 모으면 모을수록 공룡이름을 쓰는 속도가 빨라지고, 받침의 소리도 낼 줄 아는 아이를 보면서, 가르치는 방법은 달랐지만 이렇게 너도 해낼 수 있는 아이였구나 생각하니 그저 기특하고 대견할 뿐이다.
큰 아이가 5살 되었을 때, 글자좀 읽는다고 세살난 둘째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는 영상을 얼마전 우연히 다시 보았다. 그 아이가 지금 또다시 막내아이에게 가끔 책을 읽어준다. 책과 유난히 친한 아이는 큰 아이뿐지만, 꼭 책이 아니더라도, 가끔은 편지로, 가끔은 보물찾기하는 쪽지수단으로, 가끔은 수수께끼내는 수단으로, 아이들이 여러모양으로 한글을 잊지않고 잘 사용해주고 있어 부모로서 매우 뿌듯하다.
한글을 가르치는것은 대단하게 한국적인 한국인으로 살라는 의미보다, 엄마아빠와의 연결고리이고,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연결고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우리 막내도 얼른 한글을 떼고 한글책을 줄줄 읽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우리부부에겐 세번째이자, 드디어 마지막 한글가르치기의 끝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