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볼 수 없지만 너의 미래는 분명 크고 빛날거야
"엄마 다리가 너무 아파서 잠을 잘 수가 없어, 엉엉엉.."
지난주에 이어 벌써 두번째다. 딸아이가 다리가 아파서 잠을 잘래도 잘 수가 없다며 엉엉엉 아이처럼 우는모습을 보는 것이. 타이레놀을 하나 주고는 다리를 주물러 주러 열매 방으로 들어갔다. 성장통인것 같은데 이렇게 아파하는 모습을 보니 짠하기도 하고, 이젠 제발 눈에 띄게 키좀 커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우리 딸 열매는 캐나다에서 초등학교 5학년인데 한국나이로 치면 아직 4학년이다. 키가 아직 130cm도 되지 않는, 같은학년 중에 가장 작은 아이이다. 평소엔 그렇게 키가 작은지 잘 느끼지 못하다가 가끔 학교에서 콘서트가 있거나 같은 학년 전체가 무대에 올라가야 할 일이 있을 때, 눈에 띄게 작은, 그래서 늘 맨 앞에 서 있는 우리 딸을 보게된다. 캐나다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보니 다양한 인종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 단연 최장신 흑인 아이들은 선생님인가 싶을 만큼 키가 큰 아이도 있다. 그 아이와 우리아이가 나란히 서있기라도 하는 날엔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저렇게 작아도 괜찮은건가 싶고, 왜 하필 가장 키가 큰 아이 옆에 가장 작은 아이인 우리 아이를 세워놨는지 선생님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다.
그런 열매가 오늘따라 무엇이 마음속에 차올랐는지 다리가 아프다고 애기처럼 엉엉 울면서 갑자기 그동안 못다한 이야기 봇따리를 풀듯 앞뒤 사정없이 쏟아낸다.
"나는 키가 작은데, 그게 나한테 너무 큰 컴플렉스인데 133cm인 아이가 나보고 자기도 키가 작다고 말하는거야. 그럼 나는 어떡하라고.."
"자기가 누가봐도 나보다 키가 큰데 내 앞에서서 너랑 나랑 키 한번 재보자는거야. 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나올거 같았는데 여기서 울면 분위기가 이상해 질까봐 꿈 참았어.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어"
"여자아이들이랑 노는게 너무 힘들어. 여자애들이 싫은건 아닌데, 나는 그런 의도로 말한게 아닌데 너무 예민하게 대답하고, 여자애들은 툭하면 울고, 나한테 왜 자기 화나게 하느냐고 말해. 난 그런 말을 한게 아니었는데.. 결국 내가 사과를 하긴 했지만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어. 근데 그냥 참았어. 남자아이들이었으면 아 그래? 하고 넘어갔을 말인데.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반에서 수학을 잘하는 아이라고 소문이 났어. 그렇게 잘하는건 아닌데. 그래서 그룹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내가 그 문제를 풀지 못하면 나는 키도 작은데 문제도 못푸는,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느껴져."
"우리반에 좀 모지리 같은 아이가 있어. 남자앤데.. 나는 그 아이를 도와주고 싶을 때가 종종 있어. 그렇다고 걔랑 친구가 하고싶은건 아니야. 그냥 가끔 도움을 주고싶을 뿐이야. 그런 내가 너무 싫어. 나쁜사람인 것 같아서 싫어."
"선생님이 가끔 수학 시험지를 친구들이랑 바꿔서 채점하라고 하거든. 내가 채점한 그 친구가 단위를 전부 잘못써서 선생님한테 물어보니 틀렸다고 하라는거야. 그래서 그 친구가 전부다 틀린게 됐어. 그게 나 때문인거 같고 너무 미안해."
"수학문제를 다 맞고나면 친구들이 자꾸 나를 부러워하고 잘했다고 하는데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친구들은 자기들이 자랑하고 싶은걸 다 자랑하는데, 나도 가끔은 내 자랑이 하고싶은데 그러면 친구들이 나를 자랑 잘하는 애로 볼까봐. 그리고 그러면 예의없어 보일테니까 나는 자랑도 안해.. 가끔은 하고싶어."
"나는 그냥 계속 어린이이고 싶어. 크고싶지 않아. 이렇게 스트레스 받으면서 사는게 힘들어."
스트레스.. 스트레스.. 할 일이 너무 많다...
나는 이 말이 도대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가 한국 애들처럼 방과후에 학원 뺑뺑이를 다녀야 하는것도 아니고, 겨우 한다는건 토요일 오전에 피아노 45분 레슨, 토요일 오후에 엄마랑 하는 수학 공부가 전부인데. 스트레스????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할 일이 많다고?? 어떤 할 일이 많다는건지 말해줘봐. 엄마가 지금 잘 이해가 안되서 그래."
"금요일날은 특히나 피아노 연습도 해야지, 엄마가 내준 수학숙제도 해야지, 학교에서 보는 테스트 준비도 외우는 테스트 준비도 해야지, 스펠링테스트 준비도 해야지, 읽어야 할 책도 있고.. 할 일이 너무 많은데, 나는 너무 힘든데, 크면 점점 더 할 일이 많아진다니 너무 싫어."
"아~ 듣고보니 금요일엔 특히나 할 일이 훨씬 많긴 하네.. 엄마는 너가 맨날 방에만 있길래 뭘하나 했는데 너는 할 일이 많았었구나? 그런데 정말 대견하네 우리딸! 엄마 내준 수학 숙제, 사실 안해도 되는건데. 못 할 수도 있는건데. 너는 지금까지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단 한번도 숙제를 안해온 적이 없었어. 그리고 엄마는 너가 학교에서 종종 테스트를 보는 줄은 알았지만 그걸 준비하기 위해서 너는 미리 알고 공부를 하고 있었구나? 사실은.. 전부 다 안해도 되는 일인데. 깜빡할 수도 있고, 하기 싫어서 안할 수도 있는 일인데 너는 성격상 그게 안되는 거잖아. 신경이 쓰이는 거잖아. 스트레스라고 말하지만 너는 너의 일들을 빠짐없이 챙겨서 하고 있는거잖아. 초등학교 5학년이 그걸 스스로 할 수 있다는건 정말 대단한거야.
그리고 있잖아 열매야..
너가 키가 작은건 맞지만, 그래서 엄마도 걱정을 많이 했던건 사실이지만, 요즘 너가 먹는 양이 늘었다는 사실만으로 걱정을 많이 내려놨어. 사람마다 키가 크는 시기는 다 달라. 그냥 너가 다른 아이들보다 좀 늦게 시작이 될 뿐이야. 거봐. 이렇게 너가 엉엉 울정도로 다리가 아픈것도 사실 좋은 징조라고 생각해. 다리가 아프고 다음날 5cm씩 크면 좋겠지만 그렇진 않아. 자꾸 성장판이 자극을 받고 하다보면 어느샌가 너도 모르게 쑥쑥 크게 될거야. 다른애들보다 늦게 시작될 뿐이야. 너는 사실 아직 시작도하지 않았다고 봐야지. 아직도 이렇게 몸에서 애기냄새가 나는데.. 너에게 키가 작다고 비꼬며 말하는 아이들이 잘못된거지, 그게 너가 울음을 참아야 하는 문제는 아니야. 속이 상하고 기분이 너무 나빠서 눈물이 나면 울어도 돼. 그 자리를 무작정 피하려고만 하지마. 울어도 돼. 차라리 울어. 친구들이 무안해 할 것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어. 너가 학교에서 속상해서 엉엉 울어서 비록 그날 하루 분위기가 안좋을 수는 있겠지만, 다음날 아무일 없었던 듯 또 학교에 가는거야. 그래도 괜찮은거야.
키가 작다고 그 대신, 그 단점을 감추는 조건으로 너가 늘 쿨한척 할 필요는 없어.
키가 작다고 그 대신 다른 애들보다 뭔가를 더 잘할 필요도 없어.
키가 작아서, 대신 너가 더 착한애로 보일 필요도 없어.
키가 지금 작은거지. 키는 곧 클건데.
그것 때문에 마음 졸이지마.
너는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고, 충분히 자랄거고, 너는 너를 작다고 우습게 보는 아이들에게 결국은 멋진 한방을 날려줄 대단한 사람이 될거야. 분명 그럴거야."
다리를 주물러 주러 들어갔다가
아이와 한시간 반을 떠들었다.
한시간 반을 줄곧 울면서 이야기 하는 딸 아이를 보고 있자니, 남들은 성장이 빨라서 난린데 왜 우리애는 이렇게 늦어서 난리인가 싶었다. '키'라는 단어가 나올때 마다, 움찔하는 나보다 속으로 더 움찔 하고 있을 이 작은 아이를 상상하자니 또 마음이 미어졌다.
키가 작은 만큼 생각하는 것도 어린아이 같음 좋을걸. 왜이렇게 생각하는건 다큰애 같아서 더 안쓰러운지..
키가 작다는 커다란 단점을 어떻게든 감춰보려 애쓰는 이 작은 아이가 너무 가여웠다.
키도 작은데 눈물까지 흘리면 더 작은 아이로 취급받을까봐 그것까지 걱정하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늘 별일없어~ 응 괜찮아 엄마. 하고 말하면서도 얼마나 속으로 작은 키때문에 애가 닳을지, 마음이 좋지 않았다. 밤 늦게 퇴근하는 남편과 전화통화를 하며 오늘 열매랑 나눈 이야기들을 이야기해줬다.
딸이랑 단 둘이 이야기를 할 떄는 덤덤했는데 남편한테 구구절절 이야기 하는 동안에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한국이었다면 키 크는 주사라도 놔줬을텐데 싶고.. 또한번 우리가 캐나다에 살고있는 현실이 싫었다.
키가 작아서 자신에게 어떤 불리한 말을 들어도 늘 쿨한척 하는 아이.
내가 너보다 낫지! 라고 하고 싶지만 키가 작아서 어떤 말도 못하는 아이.
키는 작지만 도움이 필요한 친구를 외면하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이 아이의 마음을 점점 크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것도 같다. 작지만 강하게, 그 강함으로 한발씩 앞으로 앞으로 내딛다가 어느날 자신도 모르게 훌쩍 자라있는 아이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