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불능

수직선을 벗어나지 못하는 감정 위에서의 줄타기

by 찐빵

'오즈의 마법사'의 등장인물들은 무언가를 얻고자 도로시의 여정에 동참한다. 허수아비는 뇌를 필요로 하고, 겁쟁이 사자는 용기를 얻고자 한다. 그중 양철 나무꾼은 심장을 원한다. 단순히 사랑을 못 한다는 이유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 자신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였다고, 그는 되뇐다.


그를 볼 때마다 거울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무엇을 해도, 무엇을 봐도 김 빠진 콜라를 들이켜듯 허전함은 늘 함께했다. 내가 웃었을 때 진심으로 기뻤을까. 울음을 보일 때 세상이 떠나갈 정도로 무너졌는가. 돌이켜보면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겉모습과 속마음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 남들에게는 열심히 경청해 주는 상담사 같은 이미지지만 실제로는 흔히들 말하는 'T발놈'의 정석이다. 저들이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나로선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F처럼 행동할 수 있었던 건 표독하게 드러냈던 가짜 표정 덕분이다. 남들은 즐거워할 때는 즐거운 표정을, 슬퍼할 때는 무거운 표정을 지어야 분위기를 파악할 줄 알고 공감할 줄 아는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도, 공감도 전부 노동이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자연스러움이 사라진 이상 여느 사람들처럼 입체적인 기억을 새기는 용도로는 쓰일 수 없었다. 역으로, 억지 표정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짓는지 배우기 위해서 감정을 '분석'해야만 했다. 그래서 배로 고통스러웠다. 마치 괴짜의 숙명이라는 듯 현실은 가혹하게만 다가왔다.


내 감정은 분석의 용도 이상으로 복잡하지 않다. 도구를 손에 익히는 원리라고 보면 된다. 마치 컴퓨터가 2진수로 모든 숫자를 표현하듯, 나 역시 2진수로 모든 감정을 표현한다.


1

보통 좋아하는 일을 '마친' 경우 대개 이 상태가 된다. 어떤 것을 해내고 나면 성취감이 즉각적으로 찾아오면서(과로하는 날에는 이마저도 찾아오지 않을 때가 있다) 일시적으로 취하게 된다. 그 뒤 그런 일을 해낸 자신을 칭찬하면서 과거의 영광에 몇 번이고 젖는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년씩이나 이어진다. 과거에 머무른 사람으로 보일 수 있지만, 행복은 가뭄에 내리는 단비처럼 상당히 귀하기 때문에 결코 마다하지 않는다. 행복감은 이후 서서히 가라앉는데, 바닥을 치기 전에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면 0, 점차 -1의 상태로 접어들게 된다.

굳이 '마쳤다'는 조건이 붙은 건 좋아하는 일의 특성상 어쩔 수 없다. 난 확실하게 결과를 입증할 수 있는 활동에만 이상하리만치 끌렸다. 독서, 언어처럼 지식을 쌓는다거나 '리그 오브 레전드'의 솔로랭크처럼 성적이 올라간다거나.


0

무의 감정이 유지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행복한 걸 의미한다.

1과는 결이 다르다. 1이 쟁취의 성격을 띠었다면, 0은 '아무렇지도 않아서' 안정된 행복이라고 보면 된다. 평범한 것이 제일 어렵다고들 하지 않는가. 특히나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음의 상태를 웃도는 게 일상이다. 그 상태가 지속되면, 되려 아무렇지도 않은 날을 행복으로 여기게 된다. 어디까지나 행복은 상대적이니까.


-1

기본적으로 이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상황에서 이 상태에 놓인다. 취미(라고 부르는 노동)를 하는 중에도, 운동을 해도, 가만히 있어도, 밥을 먹으러 갈 때도, 살이 찔 때도, 다이어트를 하고 있어도, 잠들기 직전에도, 기상한 직후에도.

0에서 -1로 전환되는 경우도 상당수 존재한다. 특히 공허함과 허무함으로 자주 바뀐다. 누군가 곁에 있는 모습을 동경할 때마다 지독하게 시달려서 그런지 몸이 기억하는 감정이 됐다. 반대로 함께라는 느낌은, 여태 그랬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그게 뭔지도 모른다.


이게 일반적인 감정이랑 뭐가 다르냐고 할 수 있는데, 내 감정은 꽤 수직적이다. 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상상 속에서 형상화시키면 늘 그랬다. 단순히 즐겁고 화나는 여부는 체감하지만 당황스럽다, 무섭다 등의 다채로운 수식어는 잘 쓸 수 없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온도계가 온도 외에 화창하고 개운함을 표현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되면 보통의 사람과는 완전히 딴판의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한 마디로 건조해진다. 간혹 글을 쓰고 쭉 읽어보면, 이것만큼 읽는 그대로를 전달할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차가운 느낌을 받았다.

탐구에 특화됐던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탐구에 있어서 인간미, 특히 인간 심리는 되려 불필요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겠지?' 같은 명제를 기정사실화하고 가지를 뻗어나가면 점점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기 마련이다.

한 가지 간과했던 건, 때론 이성과 논리로도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인간 심리를 내포한 주제에 한해서는 너무도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주식을 경제학개론으로, 인간 심리를 인간심리학으로 정형화시키려는 시도가 수도 없이 이루어졌음에도 전부 가능성에 그쳤던 이유가 있었다. 정작 그 분야에서 성공을 맛본 사람들은 그런 부류를 이렇게 부른다. '겁쟁이'. 이론만 빠삭하게 알고 시도하지도 못한 겁쟁이 말이다.

그 누구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음에도 왜 시도하기 꺼려할까. 따져보면 답은 간단하다. 세상은 이론대로 흘러가지 않으니까. 주식이든, 연애든, 심지어 도박이든 이론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 모두가 워런 버핏이나 고니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극복을 안 해본 건 아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비슷한 증상을 찾을 수 있었다. 감정 불감증이라며, 어떤 것을 해도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그나마 현 상태와 가까웠다.

해결 방법에 감정에 이름 붙이기가 있었다. 말 그대로 사소한 감정에도 이름을 붙이면서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몸이 떨리는 건 이런 감정이구나,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이런 감정이구나 라며 현상과 감정을 매칭시키는 게 전부다.

하지만 이성으로 감정을 받아들이는 순간 본래 목적과는 어긋나는 기분이었다. 본래 감정은 본능적으로 감지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야만 비로소 가슴에 와닿는 '감각'이 된다. 이성으로 감정을 다루는 건 이미 완벽하게 하고 있었다. 아니, 너무 과하게 잘해서 더더욱 겉돌고 있던 거다.


양치기를 하니까 피상적으로나마 도움이 되긴 했다.

남들은 이런 감정을 받아들이는구나 하고, 정말 많은 상황에 처하고 많은 사람들을 접하면서 대체적인 심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남의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그러면 '대개' 사람들은 어떻더라, '보통' 이런 생각하지 않나, 라면서 그들의 대화에 점차 섞여 들어갈 수 있었다.

진성 악바리인 나한테 최적화된 방법이다. 문제는, 그 데이터를 쌓으려면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나야만 한다. 고작 몇 명 만나는 것도 힘들어하는 내가 모임을 나간다니. 그것도 데이터를 쌓겠다는 목적으로. 일생일대의 기회로 치부해도 모자를 판국에 참 팔자 좋은 아이디어였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대책일 뿐. 결국 그 감정이 뭔지도 모른 채로 이해하려는 건 일생일대의 사건이 있지 않은 이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감정의 편협화를 부작용으로 치부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방식의 잘못 보다 '시기'에 있다.

난 나이에 맞지 않았다.

대학교 새내기 시절, 학생 회장이 해줬던 인상 깊었던 멘트가 있다. 성적, 경쟁으로 점철되어 있던 여러분들의 고등학교 생활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청춘을 만끽할 시간이라는 거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나만한 적임자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이 학교에 입학했으니까.

하지만 내 인생은 갖가지 감정으로 물들여지는 여느 대학생의 청춘과는 동떨어지기만 했다. 한 번 실패한 이상 영원한 실패자로 낙인찍히는 현실이었다. 그건 너무 덥고, 때로는 살을 에는 정도로 추워서 목숨이라도 부지하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감정을 버려야만 했다. 비록 감정의 주체성이 사라지긴 해도 급한 불을 끄는 게 우선. 내 손을 떠나버렸다며 후회하는 건 나중의 문제였다.

그 쓰린 추억이 결국 괴물을 낳았지만..




왜 지금 글을 쓰면서도 화가 나는 걸까. 왜 미련 섞인 채로 글을 마무리 짓고 있지 못할까.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마저도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는 건 왜일까.

만족하지 못해서이다. 결말도, 미래도, 초라한 내 인생도.


난 그래서 살아있다.

무언가를 이뤄내고자 하는 강한 욕구가, 발전의 여지를 찾으려는 강한 욕구가 감싸고 있기 때문에, 난 움직여야 함을 느끼고, 그게 내가 살아있는 이유가 된다.


앞선 모든 경험과 증거는 감정과의 싸움을 필패로 확정 지었다. 불가능이라고, 여태 그래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하지만, 아직 숨 쉬고 있다면 이겨야 할 싸움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 감정이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일요일 연재
이전 03화성장: 항상성 (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