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가 품고 있는 가치는?
과거 6개월이란 시간 동안 나와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며 공부한 분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유머의 위대함에 대해 글을 써보고 싶다."
하지만 글이 올라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에 대해 계속 궁금증을 가졌다. 왜 유머가 위대하다고 했을까??? 그래서 나는 그분의 입장에 서서 왜 유머가 위대한지 생각해 봤다. 일단 그분은 개인의 자유를 매우 중시하는 분이므로 자유를 중시하는 관점으로 살폈다.
유머가 위대한 이유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버거워질수록, "웃을 일이 하나도 없다."라는 말을 버릇처럼 되뇌곤 한다. 뉴스는 늘 무거우며, 정치적 분열은 끝이 없고, 인플레이션은 웃음을 얼어붙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유며는 더 치명적인 무기로 작용한다. 무거운 현실 속에서 누군가는 농담 한 마디로 타인의 피로를 덜어내고, 누군가는 가볍게 던진 위트로 커다란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유머란 언제나 그렇듯, 인간이 가진 가장 비정치적이면서도 가장 정치적인 언어다.
유머는 대상을 살리고 현실을 가볍게 만드는 힘이 있다. 예를 들어 정치 토론이 지루할 때, 한 줄의 농담이 진실을 가장 정확하게 요약할 때가 있다. 케탄지 브라운 잭슨 대법관이 트럼프 정부의 출생 시민권 정책을 비판하며 사용한 “catch me if you can”이라는 문구는 법적 논거 이상의 힘을 품고 있다. 이는 대중의 감각에 가장 직관적으로 꽂히는 방식이다. 논문 열 편을 열거하는 것보다 한 마디의 농담이 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처럼 유머는 공동체를 하나로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념이 다른 사람들이 같은 농담에 웃을 수 있다면, 그들은 완전히 적대적인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유머에도 그림자가 있다.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유머는 비열함으로 다가올 수 있고, 조롱은 폭력처럼 다가올 수 있다. 특히 정치적 맥락 내에서 유머는 도구이자 무기이며, 때로는 가면으로 작동한다. 농담은 불편한 진실을 감추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머는 조심스러우면서도 과감하게 사용해야 하는 언어다.
유머가 위대한 이유는 절대적으로 빼앗을 수 없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기후 변화와 전쟁 그리고 정치 양극화가 이 세계에서 우리는 희망보다 유머를 먼저 잃게 만든다. 하지만 바로 그때, 누군가의 유쾌한 유머한 줄에 말도 안 되는 이미지 또는 풍자에 다시 살아 있음을 느낀다. 결국 유머란 인간이 현실의 복잡성과 모순을 견디기 위해 발명해 낸 가장 위대한 언어라 할 수 있다. 이는 종교보다 더 넓게 사람을 품고, 정치보다 더 선명하게 세계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머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웃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우리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SNL을 통해 들여다본 유머
유머는 모든 것을 짓누르는 힘이 있다. 요즘 SNL 프로그램에서 정치인들을 향해 웃음을 자아내는 모습을 보면 그렇다. 웃음을 이기는 '모든 것'이란 범주를 들여다보면, 사회적 지위, 인간관계 그리고 초콜릿 케이크 위에 꽂힌 촛불처럼 위태로운 명예까지 포함되어 있다. 다만 최근에는 웃음을 유발한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SNL은 Saturday Night Live의 약자이다. 다만 몇몇 사람들의 기분을 Monday Morning Cringe로 만들기도 한다.
SNL은 누구를 조롱하느냐에 따라 그날의 유튜브 알고리즘을 지배하는 영웅이 되기도 하고, 프로불편러들에게 불태워지는 장작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성역 없는 풍자정신이 박수를 받지만 또 다른 날에는 "아 굳이 저렇게까지?"라는 탄식을 자아내며 키보드를 두들기게 만든다.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현대 코미디의 미덕일지도 모른다. 불편함 속에서 숨겨진 진실을 캐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을 즐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대체로 말이다.
SNL이라는 프로그램명에서 볼 수 있듯, SNL의 유머는 미국식이다. 미국의 어느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면 수위는 상당히 강하다. 성역에 가까운 인물인 마틴 루터 킹을 패러디하고, 성스러움을 희화화하며, 거의 종교적 경지의 정치적 올바름을 발가벗기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미국 시민들이 보기에는 "이거 신성모독 아닌가?" 같은 불편함을 마주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풍자식 유머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하나의 전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내가 나를 먼저 비웃는 자기 비하 전략이다. 이게 없으면 풍자는 순식간에 조롱으로 퇴색되고, 유머는 누군가를 향한 공격 무기로 전락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미국 코미디의 커다란 뿌리는 자학에 의거하고 있다. 그들은 누군가를 풍자하기 위하여 일단 벽에 자신의 머리를 박아놓고 시작한다. 지금 급하게 예를 들어보자면, 어느 조선족이 한국 코미디 무대 위에서 "나는 조선족 중에서 가장 착한 조선족이다." 같은 게 대표적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 모습은 너무 감동적이어서 네가 날 싫어할 수 없을 거야." 같은 멘트가 있겠다. 물론 유머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부족한 멘트다. 다만, 이러한 멘트들은 모두 계산된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풍자의 정석이자 함정이다. 우리가 미화된 캐릭터를 보고 감동받을 때, 실은 그 감동마저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 말로 이중으로 조롱하는 묘미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유머를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 "이건 도가 지나치네."라고 소리치는 그들의 말은 종종 정답처럼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웃음이란 원래 편안한 게 아니다. 웃음은 원래 인간의 본능적인 경고음에 가깝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지금 뭔가 이상한데? 그래도 웃자"라는 종류의 웃음이 대표적이다. 때로는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웃는 것 자체가 혁명적인 행위일 수도 있다. 고로 풍자란 세상의 약한 고리를 꼬집는 일이다. 문제는 그 약한 고리가 우리가 될 수 있다는 데 있다. "나는 괜찮아. 저 사람들이 문제야"라고 생각하고 웃다 보면, 어느 순간 TV 속 캐릭터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걸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라고 중얼거리게 된다. 이것이야 말로 풍자의 순기능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아무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당시 동지는 유머는 타고나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내 생각은 아니다에 가깝다. 일단 유머를 제대로 받아들이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간단하다. 일단 자기 자신을 비웃을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한다. 정색한 채로 세상을 고치려 드는 게 아니라, "아 내가 저러니까 저런 사회가 나올 수 있구나." 정도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머는 때로는 철학보다 냉철하다. 웃음이 터지는 순간 우리는 잠시나마 위선의 마스크를 벗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마스크는 다시 쓸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시라도 벗어봤다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벗어본 사람들만이 유머를 이해하는 걸 넘어 유머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아니면 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