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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득 찬 쓰레기통을 보며

by 찡따맨


우리 집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곰팡이도 전기요금 고지서도 아니다. 쓰레기통이다.

이 친구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능력이 좀 탁월하다. 내 일상을 음침하게 엿보다가 가장 무방비해질 때 즈음 입을 벌리며 "헤헷 놀랐찌롱!" 하며 튀어나오는 녀석이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나는 딱히 뭔가를 많이 버린 기억이 없는데, 쓰레기통 내부를 보면 이미 만실이다. 오버부킹된 저가 항공기가 이런 느낌일까. 과거 영국행 비행기에서 승무원 누나가 뒤에 좌석이 비었다고 이야 해주셔서, 3개의 좌석을 독차지해 누워서 갔던 기억이 있는데..


가득 채워진 쓰레기 통을 볼 때마다 나는 여러 생각이 든다. 혹시 내가 자면서 무의식 중에 편의점에서 과자를 사 와서 먹고 포장지를 모조리 집어넣은 게 아닐까? 나 혼자 살면서 이렇게 많은 쓰레기들을 배출한 것이라면 지구 환경 파괴의 주범은 나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 세상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게 다행이다. 환경보호자들이 이 글을 보면 나를 고소할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서 나는 다른 생각을 한다. 만약 쓰레기통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고, 스마트폰처럼 "잔량 20% 남음. 쓰레기 배출을 준비하세요" 같은 알림이라도 왔다면? 나는 가득 찬 쓰레기통을 보고 덜 놀랐을 것이다. 아.. 사물 인터넷 시대라고 하던데, 아직 쓰레기통까지 닿지 않은 걸까? 내가 평소 쓰레기통에 관심을 크게 갖지 않는 것처럼 사물인터넷 시대도 쓰레기통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놀라움은 쓰레기통을 열었을 때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을 때에도 비슷한 전율을 느낀다. 학창 시절에 만났을 때에는 배우 하석진을 닮았던 친구가 어느새 아저씨가 되어 버린 것이다. 언제 저렇게 피부가 늘어졌는지, 주름이 왜 이리 늘어난 건지. 어쩌면 고등학생 때부터 담배를 피워댔으니 급격하게 노화가 된 건 아닐까. 아니면,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하여 개고생을 한 건 아닐까.


생각해 보니 어린 조카도 떠오른다. 몇 년 전만 해도 "삼촌~" 하면서 내 무릎 위에 앉던 아이가 이제는 저음 베이스를 삼킨 듯하다. "삼촌~ 저 이번에 ~ 샀어요."라는 목소리에는 남성 호르몬이 진하게 농축된 밤꽃 냄새를 은은하게 풍기고 있었다. 아아 그 순수한 아이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남성호르몬 이 자식이 다 삼켜버린 거겠찌? 무섭다 호르몬!!!!


이 모든 순간의 공통점은 시간이라는 현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때 벌어지는 착시에 가깝다. 매일마다 모든 것들은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그런데 이는 우리의 눈에 쉽게 감지되지 않는다. 쓰레기통도 사람도 그리고 나 자신도 다르지 않다. 매일 조금씩 달라지고 있고, 매일 하루하루 정직하게 쌓여나가고 있지만 우리는 그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다. 어쩌면 무시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


공부도 그렇다. 공부를 꾸준히 하고 있을 때는 내가 특별히 똑똑해졌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아침에 양치질과 샴푸를 하고, 커피를 끓이려고 하다가 라면을 끓여 먹는 실수를 범하는 바보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누구와 대화를 하다 보면 상대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이 바보 새키카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게 된 거지?" 같은 표정을 보이는 반응이 대표적이겠다.


물론 이는 상당히 기분 좋은 순간이다. 생각해 보니 과거에는 매일 5km씩 달리며 삶을 브로콜리는 초장에 찍어먹으며 다이어트를 했지. 그때의 나는 발걸음이 매우 가벼웠기 때문에 무단횡단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단횡단은커녕, 초록불이 깜박일 때에도 바로 포기하고 다음 초록불을 기다린다. ㅠㅠㅠ퓨퓨


사람들은 상대의 말에나 신선함을 발견하면 눈빛이 바뀐다. "이 새키, 집에서 뉴턴 전기를 읽었구나?"라고 생각하는 듯한 눈빛이다. 그런데 그 눈빛이 오랫동안 나를 향하지 않을 때가 있다. 어쩌면 이는 내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허송세월을 보냈다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삶의 쓰레기통이 이미 가득 찼다는 경고를 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의 삶은 투명하지 않은, 스마트하지 않은 쓰레기통과 닮아 있다. 변화는 보이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 조금씩 이루어진다는 것. 그걸 자각하는 순간은 대게 생각보다 늦은 순간이지만 말이다. 매일 조금씩 채워지는 모든 것들이 지식이든, 나이 든, 쓰레기든, 호르몬이든 결국 어느 날 뚜껑을 열 때에야 비로소 그 존재감을 드러낼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한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쌓는 것에 조금 더 신경 쓰기로 (배에 먹을 것을 가득 채워 넣겠다는 말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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