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무늬오징어를 먹었다. 오징어를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니다. 과자 오징어 땅콩은 내 쇼핑목록 256,681위 정도이며, 라면 오징어 짬뽕은 내 장바구니에서 유통기한이 끝날 정도다. 나는 오삼불고기 보다 그냥 불고기가 좋고, 오징어 순대보다 그냥 순대를 더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늬오징어를 먹은 이유는 단순하다.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는 방송을 많이 보지 않는다. 하지만 축구를 좋아해서 축구선수였던 안정환이 나오는 프로그램은 거의 다 챙겨본다. 안정환이 나오는 프로그램인 <냉장고를 부탁해>, <푹 쉬면 다행이야>는 거의 요리 프로그램에 가까운데, 여기서 가끔 무늬오징어가 등장했다. 당시 무늬오징어는 심해의 감칠맛 비밀병기처럼 묘사되어, 조선시대 임금도 쉽게 먹지 못했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나는 무늬오징어를 먹어보고 싶었지만 동네횟집을 찾아다닐 정도의 부지런한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바로 인터넷 주문을 했다. 물론 우리 집이 아니라 부모님 댁으로 보냈다. 이유는 단순하다. 손질하기 귀찮아서. 물론 부모님께 이렇게 말하면 서운해 하실 수 있으니, 적당한 효자 코스프레를 했다. 물론 손질된 제품을 구매할 수도 있지만, 손질이 되어 있으면 무늬오징어라는 걸 알 수 없으니 손질되지 않은 오징어를 주문했다.
인터넷 구매를 위해 후기글을 보니 "달다"와 같은 호평도 있었다. 오징어 주제에 달아봤자 얼마나 달 수 있을까? 오징어 땅콩, 오징어 짬뽕 그리고 오징어를 흉내내는 오잉이라는 과자에서도 단맛을 느끼기 어려웠는데 말이다. 이로 인해 내 궁금증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배송은 상당히 빨랐다. 주문을 오후 3시 정도에 한 것 같은데, 도착은 다음 날 오전 10시 정도였다. 이게 한국 물류의 힘일까? 아니면 빨리 퇴근한 뒤에 집에서 넷플릭스 보고 싶어하는 택배기사님의 열망일까. 무튼 나는 일을 마치고 저녁 즈음에 집으로 가니, 이미 손질이 다 끝나 있었다. 이 맛에 부모님 집으로 보내지.
여름이라 상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이스팩이 3~4개 들어 있었다고 하셨다. 그정도의 아이스 팩이라면 전 재산을 넣어도 시원하게 보관할 수 있겠지. 그리고 서비스로 손질한 삼치도 주셨다고 이야기 해주셨다. 난 부모님이 삼치도 함께 구워주실거라 기대했지만 삼치는 냉동고에서 나오질 않았다. 아마 그 삼치는 내가 2004년에 몰래 구매했던 월드콘 옆에 있지 않을까.
부모님이 삼치를 꺼내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오징어를 너무 많이 구매한 것이다. 1kg 정도 되는 무늬 오징어를 1인당 한 마리씩 먹으면 충분할 거라 생각했다. 손질을 하면 1kg의 오징어가 500g 정도로 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마리 반이 손질되어 접시에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수북했다.
접시에 수북하게 쌓인 무늬오징어 회는 방송과 조금 달랐다. 우리 부모님이 손질을 하셨기 때문이다. 아빠의 투박한 칼솜씨 덕분에 회가 아니라 무늬오징어 살덩이를 먹은 기분에 가까웠다. 아빠는 회 중에서도 오징어회를 가장 좋아하신다고 하셨는데, 무늬오징어 회 한 점 한 점을 보고 있으면, "사실 나는 회를 제일 싫어해."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젓가락으로 들어 올려봤다. 일단 오징어 답게 표면은 뽀얗고 매끈하고 탱탱했다. 뽀얀 속살은 중세 러시아 보드카 집안으로 유명한 귀부인, 마리나 보드카로바의 살결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사실 방금 지어낸 인물임.)
무늬오징어 회를 입에 넣는 순간, 일단 부드러웠다. 그리고 오징어 특유의 꾸리꾸리한 향이 없었다. 무늬오징어는 심해 50m 정도 되는 깊은 곳에서 산다고 하던데, 그러면 무늬오징어보다 더 깊은 곳에서 사는 심해어는 얼마나 비린내가 덜 할까? 그리고 내 시식평은 여기서 끝이다.
방송과 후기글을 보면 단맛에 대해 이야기를 했으나, 내 혀가 느낀 건 초장에서 느낄 수 있는 약간의 달달함 정도였다. 감칠맛 폭발까지는 아니고, 감칠맛이 폭발되기 전에 폭탄 해체반이 와서 안전핀을 뽑아버린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다. 나만의 추측이지만 무늬오징어의 죽음과 동시에 감칠맛 폭탄 안전핀도 함께 뽑혀버린 게 아닐까.
그 순간 고민에 빠졌다.
여기서 범인은 누구일까?
무늬오징어를 심해의 감칠맛 비밀병기로 포장한 방송국 놈들일까?
"달다"고 오바한 리뷰어일까?
아니면 특별함을 느끼지 못하는 나의 둔감한 혀일까?
곰곰히 생각하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한국인이다. 그냥 한국인이 아닌, 매운 김치, 매운 떡볶이, 매운 라면 등 긴 시간 동안 매운맛 트레이닝을 받아온 전통 한국인. 그 결과 내 미뢰는 웬만한 맛에 꿈쩍도 하지 않을 정도의 단단한 굳은 살이 생겨버린 게 아닐까? 턱걸이를 많이 하면 손가락 뿌리와 손바닥이 만나는 부분에 굳은살이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잠시 그동안 살아온 나날을 떠올렸다. 초등학교 앞에서 먹은 매운 떡볶이가 내 미뢰에 조금씩 굳은살을 형성시키고 있었던 게 아닐까. 부모님을 따라 다니며 먹었던 매운 닭갈비, 매운 비빙냉면, 쫄면, 매운 돈까스, 짬뽕,,,, 등등등등드읃ㅇ
아아.. 무늬오징어가 심해에서 열심히 애지중지 키워 올린, 심해의 감칠맛 폭탄 조차도 단단하게 굳어져 버린 내 미뢰 앞에서는 그 어떠한 존재감도 드러내지 못하는구나.
한 마리 반을 회로 떴음에도 불구하고 양이 많아서 아빠, 엄마, 나 3명이 모두 먹지 못했다. 그래서 남은 건 라면에다가 퐁당 넣었다. 나는 여기서 살짝 기대를 했다. 심해의 감칠맛 비밀병기 무늬오징어가 라면에 들어간다면, 너구리 라면에 들어있는 다시마보다 감칠맛을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라면을 끓이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오징어를 라면에 넣으면 꾸리꾸리한 냄새가 올라와야 하는데 그런 게 없었다. 내가 무늬오징어를 넣은 게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무늬오징어는 조용했따. 마치 회식자리에 앉아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침묵하고 계시는 이름 모를 부장님처럼. 자리에 있지만 존재감을 발휘하지 않는.
라면 국물을 한 숟갈 떠먹어봤는데, 심해의 감칠맛 비밀병기 무늬오징어가 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냥 탱탱한 식감 정도가 전부랄까. 이쯤되면 무늬오징어는 심해의 감칠맛 비밀병기가 아니라, 존재감을 숨기는 데 능한 심해의 비밀정보 요원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무늬오징어를 넣은 라면은 감칠맛의 향연이 아닌, 그냥 오징어가 들었는지 느껴지지 않는 오징어 라면이었다. 물론 오징어는 부드러웠다.
어쩌면 내 입맛이 문제일 수도 있겠다. 많은 사람들이 소고기를 좋아하지만 난 돼지고기를 더 좋아한다. 우리 부모님은 항상 형을 생각하셔서 소고기를 준비하셨는데, 내가 엄마에게 "엄마, 나를 한 번이라도 생각한다면 항정살과 삼겹살도 함께 준비해줘." 라고 말할 정도다. 막내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소고기 보다 돼지고기를 12,162배 정도 더 좋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과거 복어회를 먹을 떄에도 "방어회가 더 맛있는데, 방어회가 더 맛있는데.."를 반복했다. 물론 얻어먹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면 진상이었겠지만, 내가 밥을 사는 자리였기 때문에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이쯤에서 잠깐 드는 생각이지만, 당당하게 할 말을 하고 살려면, 매일 밥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돈이 많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무늬 오징어를 먹을 때에도 부모님 앞에서 당당하게 불평불만을 할 수 있었다.
아아아 돈벌자!!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