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출생 시민권, 정체성에 대한 질문
2025년,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벌어진 출생 시민권 논쟁이 화두다. 이는 한 조항의 해석에 그치지 않았다. "누가 미국의 국민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미국 대법원은 트럼프 행정부가 시도한 시민권 제한 행정명령을 단순 정책 변경으로 보지 않았다.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보편 권리를 통치 수단으로 전락시키려는 시도로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인 입장에서 보면 트럼프 행정부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많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적법은 철저한 혈통주의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 중 한 명이 한국 국적자여야 아이는 대한민국 국민이 될 수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한국어로 말하며, 김치를 사랑하는 아이임에도 부모가 모두 외국인이라면 여전히 외국인 등록증을 지닌 채 살아야 한다. 이 아이들은 대한민국 땅 위에 살아가고 있는 구성원이지만 법적으로는 외국인 자녀인 것이다. 그렇게 출생 시민권은커녕 다문화 2세대에게는 병원과 학교, 공공기관에서조차 정체성에 대한 확인이 끊임없이 요구된다.
미국 헌법 제14조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그 관할권 하에 있는 자는 시민이다."라 명시하고 있다. 이 조항은 남북전쟁 직후 해방된 노예들에게 시민권을 보장하고자 하는 역사적 맥락에서 탄생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건든 키워드는 관할권이다. 관할권은 단지 물리적 장소에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정치적, 법적 소속으로 미국의 법적 주권에 완전히 복속된 존재로 본 것이다. 한국 외교관 부부가 아이를 미국에서 낳았을 때, 그 아이가 미국 시민권을 받지 못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본 것이다. 고로 불법 체류자 또한 이와 같은 논리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적으로 헌법을 해석하자면, 원문주의를 따르게 된다. 미국 수정헌법 제14조는 노예제 폐지를 전제로 한 남부의 반발을 무력화하기 위한 장치였다. 다시 말해 수정헌법 제14조는 이민자 유입을 보장하기 위한 조항이 아니었던 것이다. 고로 트럼프 정부는 현재의 출생 시민권 제도가 국제적 출산 투어리즘, 이민 악용, 복지 남용의 근거가 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관할권의 의미를 엄격하게 해석하여 불법체류자의 자녀에게 자동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도록 하는 게 국가 질서의 회복이라 본 것이다.
물론 헌법 제14조는 과거 영국법인 "국왕의 영토에서 태어난 자는 국왕의 신민"으로 간주되었으며 이는 미국 독립 후에도 대부분의 주와 연방에서 유지되었다. 하지만 영국은 1983년 1월 1일 이후로 제도가 바뀌었다. 부모 중 적어도 한 명이 영국 시민이거나, 영국의 영주권자 거나, 합법적 체류 자격을 받은 자의 아이여야 시민권이 부여된다.
미국 헌법 제14조는 약 100년 넘게 지켜 저 온 가치이므로 이 조항을 만지게 되면 헌법적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에 커다란 타격을 입을 게 뻔하다. 과거 판례에서도 불법 이민자의 자녀여도 미국에서 태어나면 시민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한국인이기에 트럼프 행정부의 주장이 합리적이라 다가올 뿐이다. 물론 트럼프 행정부의 결정에 항상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은 아니다.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
미국 대학들은 오랜 시간 동안 자유를 핵심 가치로 주장해 왔다. 표현의 자유를 시작으로 하여 학문, 토론의 자유. 하지만 이 자유가 어느 지점까지 보호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자유를 외치며 국가의 막대한 지원을 받는 대학들은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2023년 10월 7일, 이스라엘에 대한 하마스의 공격 이후 미국 대학가에서 반유대주의 시위와 발언이 쏟아지고 있다. 이는 단순한 국제 갈등으로만 볼 수 없다. 명백한 증오 표현이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Zionists should die(시온주의자들은 죽어야 한다)”라는 문구가 포스터에 등장했으며, 유대인 학생은 강의실에서 쫓겨나거나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이는 반이스라엘을 넘어 반유대주의로 확장되었다. 유대인 학생들이 신변 위협을 호소했음에도 대학은 자유로운 토론의 장이라는 이유로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미국 정치권에서도 인식되었다. 그렇게 하버드, 펜실베이니아, MIT, 컬럼비아 등 명문대학 총장들은 연방 하원 청문회에 소환되었다. "혐오 발언과 폭력 조장도 표현의 자유인가?"라는 질문이 이어졌으며, 일부 총장들은 "문맥에 따라 다르다." 정도의 모호한 답변으로 일관했다. 그렇게 대학이 진정으로 공공기관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던져진 것이다.
이에 트럼프 행정부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명백한 증오 발언이 용인되고, 특정 학생들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연방정부는 공적 자금을 지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실제 수억 달러에 달하는 연구 지원금을 시작으로 장학금 삭감까지 이어졌다. 하버드, 존스홉킨스, 컬럼비아 등의 대학들도 이를 피할 수 없었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하지만 증오의 자유까지 허용될 수 있을까? 여기서 질문을 던지게 된다. 혐오 표현이 학문의 자유와 공존할 수 있는지, 자유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할 때에도 자유일 수 있는지.
이는 과거 사례와도 연결된다. 1983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인종차별 정책을 고수한 밥 존스 대학교에게 세금 면제 혜택을 철회했다. 이 학교는 혼혈 결혼과 데이트를 금지하고 흑인 학생들의 입학을 제한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대법원은 종교의 자유를 주장한 학교 측의 논리를 기각하고 공공의 이익이 종교적 신념보다 우선될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
트럼프 행정부 또한 이와 유사한 논리를 빌렸다. 하지만 차이는 다소 있다. 밥 존스 대학은 인종차별이라는 공공 해악을 끼쳤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 대학이 겪는 갈등은 보다 복잡하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가 가한 연구비 삭감은 주로 젠더, 기후 변화, 다양성 등의 진보적 주제에 집중되었다는 점에서 정치 보복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표현의 자유를 명분으로 내세운 제재가 오히려 다른 사상이나 학문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작동한 셈이다. 고로 트럼프 행정부가 보여준 자유 또한 또 다른 자유의 왜곡인 것이다.
이 논의는 한국으로도 전개시킬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동덕여자대학교 남녀공학 전환 반대 시위다. 여대의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주장 하에 일부 학생들이 본관을 점거하고 수업을 거부하며, 기물을 파손했다. 이 시위는 단순한 의견 표출이 아닌, 대학이라는 공동체를 마비시켰다. 시위대의 뜻에 동의하지 않는 학생들은 학습권을 박탈당했고, 교직원들도 위협을 호소했다.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표현이라는 이름으로 공동체의 질서와 타인의 권리가 무시된다면 이는 자유가 아닌 권력일 뿐이다. 특정 이념을 절대화하여 학교 전체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움직이려는 시도는 다수가 아니라 소수와 약자의 자유를 위협하는 구조로 작동한다. 문제는 이것이 반복적으로 표현의 자유라는 방패를 들고 행해지고 있다는 데 있다.
표현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가치다. 하지만 그 자유가 타인의 안전을 위협하고 공동체를 불안정하게 만들며, 공적 자금을 이용해 특정 이념을 선전하려는 수단으로 전락한다면 사회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