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보다 권력, 귄위만 쫓는 혀
지식인이라고 하면 대부분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 안경을 쓰고, 머리가 많이 벗겨지고, 책이 가득한 서재에서 조용히 중얼거리는 모습, 두꺼운 책을 숨 쉬듯이 읽고, 어려운 말을 줄줄 뱉으며 남들보다 똑똑하다는 티를 팍팍 내는 모습, 어디선가 본 듯한 이론을 무척 어려운 어휘를 반복하면서 설명하는 모습이다. 왠지 그들 곁엔 차갑게 식어버린 차가 담긴 머그컵만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유시민이 지식인이라는 이름으로 사랑받았던 이유는 이러한 이미지 덕분이 아니었다.
물론 그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었고, 말도 잘했다. 방송에 나와 시사 문제를 줄줄 풀어내는 능력도 좋았다. 진짜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유시민이라는 인물이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시절을 잘 들여다보면, 그는 단순 지식 전달자가 아니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을 보면 "이건 아닌 거 같은데용;;"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사회 시스템의 허점을 들추고, 권력의 화려한 포장지를 찢어내며, 그 뒤에 숨어 있는 오물까지도 집요하게 파고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를 좋아한 건 지식 때문이 아니다. 그 지식을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 덕이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진정한 지식인은 책상에만 앉아 있는 존재가 아니다. 시대의 이면을 보고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할 말은 하고, 맞을 줄도 알고, 그래도 입은 다물지 않는 사람 정도로 볼 수 있다. 어쩌면 이게 지식인의 본분일 지도 모른다.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들, 논리 싸움에는 강한데 현실 앞에선 입을 다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참 많다. 하지만 이는 협잡꾼에 불과하지. 지식인은 아니다.
지식인의 언어는 스포트라이트처럼 어두운 구석을 비춘다. 보기 싫은 진실을 보여주고, 불편한 현실을 들춰낸다. 물론 욕도 먹고, 미움도 산다. 권력은 그런 사람들을 싫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진짜 지식인은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권력이라는 괴물 앞에서 콧방귀를 뀔 줄 아는 사람이다. 때로는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진실을 택할 정도로 고집 센 인간이다.
하지만 요즘의 유시민에게서 그러한 모습이 보이는가? 그는 한때 정의의 편이었으나 지금은 정의와 적당히 타협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예전처럼 날카롭지 않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권력 옆자리에 익숙해진 모습이다. 그가 한때 그렇게 비판하던 이들과 닮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참 아이러니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지식인은 어떤 존재인가?
지식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개 무언가 굉장히 묵직한 걸 떠올리게 된다. 무심하게 안경을 고쳐 쓰며, 온갖 정보를 능숙하게 읊어내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단어 하나에도 라틴어 어원을 줄줄 외우고, 발터 벤야민을 일상 대회에 끼워 넣을 줄 아는 사람. 하지만 유시민이라는 인물은 앞선 전형적인 지식인과는 꽤 거리가 있다. 그는 방대한 논문 목록이나 외워야 할 만한 학문적 수치들보다, 사람들 마음속에 '지식인'이라는 타이틀로 박제하는 데 성공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지식을 곧장 권위로 연결시키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지식을 들고 권력의 뒤통수를 조용히 툭툭 후렸다. 그렇게 권력의 허세를 폭로하고, 불편한 진실에 조명을 비추며,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ㅎㅎ"라고 말하며, 사회 구조에 대해 아주 차분하게 그리고 꾸준히 문제제기를 했다. 사람들은 그 모습에 감동했고, 그는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단지 똑똑해서가 아니다.
고로, 지식인의 말이라는 것은 단순한 수사, 유려한 문장력을 넘어서는 무엇이다. 한 마디로 조명이다. 어두운 방에 숨어 있던 시대의 부조리를 갑자기 대낮처럼 환하게 만들어버리는 조명인 것이다. 그 조명을 드는 사람은 당연히 용기를 갖춰야 한다. 아이언맨 슈트처럼 특별한 장비가 필요한 게 아니라,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라고 말을 할 수 있는 고집스러운 정직성에 가깝다. 그리고 그런 걸 하기 시작하면, 대개 재수 없어지기 딱 좋다. 그러므로 지식인이 되겠다는 것은 인기 없는 선택을 자처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다. 담배를 입에 달고 다니며 불만스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다. 그는 지식인을 두고 "자기 전문 분야도 아닌 곳에 끼어들기를 좋아하는 사람" 정도로 재미있게 표현했다. 그 말만 들으면 뭔가 과도한 오지랖쟁이 정도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불의에 대해 침묵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사르트르는 말했다. 권력 무릎 위에 앉아 있으면 안 된다고. 그렇게 앉기 시작하면 학문도 그냥 예쁜 포장지에 불과할 뿐이다. 고로 지식인이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일 때에야 비로소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지식인은 침묵과 중립이 오히려 부동한 구조를 유지시키는 데 일조하는 기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불의 앞에서 침묵의 윤리 대신 소음의 윤리를 실천하는 자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식인을 아마추어 정신을 갖고 있는 자라고 불렀다. 여기서 말하는 아마추어는 취미 삼아하는 물고기를 낚으러 다니는 낚시꾼 같은 존재가 아니다. 돈이나 명예는 저 멀리 던져놓고 순전히 공공의 선ㅇ이라는 모호하고도 위대한 것을 위해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이어서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식인을 외도자로 표현했다. 여기서 외도는 불륜을 저지르는 그런 게 아닌, 삶의 경로에서 벗어나는 고고한 탈선에 가깝다. 이들은 애써 따뜻하게 예열된 체제에 기대는 사람이 아니라, 때론 추운 밖에 홀로 서서 눈썹을 찌푸리며 따뜻한 곳을 들여다보고는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라고 말하는 사람에 가깝다. 덕분에 대접받기는커녕, 동네 구석으로 밀려나기 딱 좋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런 삶을 감수할 수 있어야 진짜 지식인이라고 했다. 체제 안에서 조용히 박수치는 게 아니라 필요한 때는 그 박수소리조차도 의심하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침묵은 단순한 무언가 아니라, 권력을 위한 조용한 아부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지식인의 침묵은 견고한 카르텔을 강화시키는 접착제일 뿐인 것이다. 지식인은 그것을 깨부숴야 하는 자이다. 그렇다 보니 진실을 말할수록 인기 없는 사람이 되는 건 거의 기본적인 공식이다. 듣기 불편한 말이 꼭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으나, 그 불편함을 통해서 세상의 변화는 시작된다.
유시민으로 다시 돌아가자면, 그는 한때 지식인으로 불렸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의 말에는 논리가 있었고 말장난 같으면서도 뼈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이번 설난영 씨를 향해 "당신 인생에서 갈 수 없는 자리."라는 발언 그 자체로 지식인이라는 타이틀을 스스로 내려놓은 꼴이다. 그의 말은 더 이상 지식인의 언어가 아니며, 마치 엘리트 자격시험에서 탈락을 통보하는 보수적인 심사관의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는 계급과 성별 그리고 적잖은 오만함이 끼어 있었다.
지식인이란 결국 말의 무게를 견딜 줄 아는 사람이다. 말이라는 건 때론 사람을 감동시키고, 누군가의 머리를 두들겨 깨어나게 이끌어주며, 아주 드물게는 감옥까지 보낼 수 있다. 그렇기에 말에는 책임이 따른다.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자유로운 시대이지만, 아무 말이 다 용서되는 시대는 아니다. 그러므로 지식인이 된다는 건 조금씩 외톨이가 되어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피곤해하고, 불편해하고, 때로는 꼰대라고 손가락질하는 일. 하지만 세상에 필요한 것은 불편함이다. 진짜 변화는 언제나 불편함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식인은 오늘도 사람들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할 줄 안다. 귀엽게, 재미있게 말하면 베스트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에게는 그런 재주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극우 꼰대와 다를 바 없는 유시민
2025년 5월 유시민은 유튜브 방송에 출연하여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배우자 설난영 여사를 향해 "그 자리는 설난영 씨 인생에서 갈 수 없는 자리다. 그래서 지금 발이 공중에 떠 있다.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발언했다. 물론 그는 문과이기 때문에 지구의 중력 따위는 무시하고 한 여성을 우주까지 날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건 단순한 실언이 아니다. 본인 의지로 만든 고의적인 사고에 가깝다.
이 발언을 듣자마자, "저 사람은 아직도 90년대 학력지상주의와 계급 엘리트 마인드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왔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쯤 되면, 유시민은 정, 재계들에게만 허락되는 엘리트 배지를 가슴에 달고 다니는 사람으로 봐도 무방할 지경이다. 게다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진보 지식인을 자처한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채식주의자인데, 야채를 싫어하는. 진보이지만 노동자와 여성을 싫어하는 아이러니. 지식인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 의심케 만든다.
설난영 씨는 1980년 구로공단의 세진전자에서 노조위원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학벌도, 정치적 가문도 없이 스스로 노동의 현장에서 살아온 여성이다. 그녀는 감옥에 있던 남편을 지키기 위해 거리에서 싸웠으며, 생계를 위해 서점을 운영하며 자녀를 키운, 당시 한국 여성들의 삶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로 치자면, 밀양과 국제시장 그리고 타짜를 섞어놓은 수준이다. 그런 사람에게 유시민은 "그 자리는 네 인생과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유시민은 지식인이라는 자리에 설 자격이 있는가? 유시민의 말은 부조리하고 가혹한 사회에서 묵묵히 버텨낸 여성의 삶을 우습게 여긴 경멸에 가깝다.
유시민의 말에서 더 큰 문제를 꼽자면 구조적인 함의에 있다. "찐 노동자, 고졸 노동자, 그녀는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 같은 식의 발언은 명백한 엘리트주의적 발상이다. 이는 정치적 무대에는 특정한 배경을 가진 사람만 설 자격이 있다는 비민주적인 관념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국민 누구에게나 정치적 주체가 될 자격을 부여하는 제도다. "설난영이 그 자리에 설 수 없는 사람"이라는 유시민의 발언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부정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이는 유시민의 말의 가치가 땅바닥으로 추락한 것이자, 그의 사상과 인격도 허물어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권력을 비판하겠다는 지식인이 권력을 대신하여 약자를 공격하는 순간, 그 지식은 더 이상 진실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이는 그저 위선을 위한 연설이며, 선동을 위한 문장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의 말에 호응하는 유튜브 댓글을 보고 있자면,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지식인이 어떤 존재인지,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유시민의 헛소리는 이게 시작이 아니다. 2019년엔 "검찰이 노무현재단 계좌를 몰래 추적했다."라고 주장하며 사회적 파동을 일으켰다.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방송에서는 계속 떠들었다. 단순 의혹 제기의 차원이 아니라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선동에 가까웠다. 팩트 없는 사실놀이. 그리고 2021년에 모든 주장이 사실이 아니었다고 인정했다. 결국 그는 형사재판에서 명예훼손 유죄가 확정되었고, 대법원은 2024년 6월 벌금형을 확정했다. 동시에 당시 한동훈 검사장에게 3,000만 원의 손해배상을 명령받는 민사 판결도 나왔다. 이 결과는 유시민이 얼마나 무책임하게 지식인의 언어를 정치적으로 소비해왔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의 실수는 했지만 본질적으로 옳았다." 라는 태도를 고수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그는 자신을 정치 비평가로 포장했다. 그런데 현실은 더불어민주당의 나팔수이자, 특정 인물을 거론하고, 불법 사찰을 운운하고, 근거 하나도 없이 의심만으로 누군가를 벼랑 끝까지 몰아넣었다. 기자도 아니고, 수사관도 아니도, 그저 자칭 비평가. 사실 그가 쥐고 있던 것은 지식도 양심도, 윤리도 아닌 정치적이었다.
유시민이 지식인으로 사랑받았던 이유는 권력자의 뜻을 대변했기 때문이 아니다. 침묵하는 다수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설난영을 향해 날린 화살은 자신이 오랫동안 품고 있던 도덕적 언어와 가치가 얼마나 부실했는지를 스스로 드러낸 셈이다. 더욱 비극적인 건, 유시민은 노동, 서민, 진보의 이름으로 방송국 카메라 앞에 서서 눈을 반짝이던 사람이었다는 데 있다. 그 진심이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증발되었는지를 스스로가 드러낸 셈이다. 설난영 씨를 향한 날린 조롱 한 줄에 그가 쌓아온 도덕성과 가치관이 와르르 무너진 것이다. 그냥 무너진 것도 아니고, 철거 예고 없이 철거된 재건축 아파트처럼.
유시민의 말은 왜 흉기가 되었나
공적인 자리에서 여성의 삶을 경멸하고, 노동자의 계급을 조롱하며, 노년의 여성을 향해 '정신이 온전치 않다.'라는 말을 던지는 일이 왜 일어났을까. 이건 실언이 아니다. 어쩌면 이는 오랜 시간 자기 확신으로 가득 채워진 엘리트 의식을 기반으로 세상을 들여다본 결과다. 그의 혀는 이제 진실을 말하는 도구가 아니라 권력과 위선의 도구가 되었을 뿐이다.
유시민의 말은 왜 흉기가 되었을까. 어쩌면 그는 지식인을 권위의 표식으로 받아들였던 것은 아닐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판단하고, 설명하고, 계몽시키는 지식인이라는 존재를 상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를 그 환상의 중심에 자리한 것이다. 그렇게 자신보다 낮게 평가된 이들의 삶을 경외하는 태도, 이해라려는 노력, 함부로 재단하지 않으려는 자제력 등등 이것이 지식인의 품격인데, 유시민은 그 모든 것들을 부정해나가고 있다. 유시민은 그동안 지식인의 비판은 품격 있는 언어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 말이 진심이었다면, 그리고 그 가치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면, 설난영을 향한 말은 결코 나와선 안 될 말이었다. 자기 이념을 자기가 폭파한 셈이기 때문이다. 유시민이 그토록 비판했던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의 언어가 이보다 더 잔혹했나?
이 모든 현상이 단순 어느 지식인의 타락으로만 보지 않는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론장은 조용한 이성적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정제된 문장보다 자극적인 한 줄, 논리보다는 분노, 성찰보다는 선동이 더 쉽게 클릭되고 더 빠르게 회자된다. 지식인의 언어조차 이제는 누군가의 주의를 끌기 위한 장치로 전락한 것이다. 그렇게 조용히 진실에 다가가려는 사람들은 조용히 묻힌다. 사회가 그렇게 짜여진 것이다. 누가 더 강하게 말하는지, 누가 더 크게 비웃는지, 누가 더 공격적으로 발언하는가에 따라 영향력이 결정되는 사회인 것이다. 유시민 또한 그러한 게임의 룰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 어쩌면 이를 누구보다 잘 활용하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자극 없는 말은 아무도 듣지 않는 사회. 지식인조차 먹고 살기 위해 스스로 콘텐츠를 바꿔버린 아이러니. 그렇게 말의 품격은 희미해지고, 언어는 조회수를 계산하는 방식으로 재편되었다. 지식인은 진실을 파고드는 자가 아니라, 말을 기획하는 자이자, 이미지를 연출하는 자로 변모하고 있따. 이 과정에서 생각하고 사유하는 사람은 사라지고, 잘 팔리는 말들만 남게 되는 셈이다. 유시민이 설난영을 향해 던진 조롱은 한 사람, 어느 지식인의 실언으로 볼 수 없다. 우리 모두가 함께 방치해온 공론장의 풍경이기도 하다.
정직함 없는 혀, 책임 없는 명성, 비판 없는 자기반성은 결국 지식인을 더욱 추악하게 만들 뿐이다. 유시민인 비평가도 지식인도 뭣도 아니다. 그는 진실을 의심하게 만드는 자일뿐이며, 우리 사회, 아니, 적어도 내 기억 속에 오래 남게 될 것이다. 내 책장에는 조국의 책도 있고 유시민 책도 있다. 적어도 유시민 책만큼은 하루빨리 정리하고 싶다. 누군가가 내 책장을 보고 비웃을 것 같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