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사과를 모르는 지식인

해석 권력 독재를 자처하는 오만함

by 찡따맨



5월의 마지막 주, 대한민국은 유시민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전직 장관, 작가, 지식인 그리고 지금은 언어적 과실치사 혐의를 받고 있는 중년 남성이다. 그는 오랫동안 교양 있는 척하며 무게 잡았는데, 이번에는 말로 큰 사고를 쳤다.


사건은 그가 유튜브 '김어준 다스뵈이다'에 출연해 김문수 대선 후보의 배우자, 설난영 씨에 대해 말을 꺼내면서 시작됐다. 원래 방송에서 누군가를 언급할 땐 칭찬을 하든 비판을 하든 적당히 하는 게 좋다. 하지만 유시민은 그 규칙을 몰랐거나, 기억력이 안 좋은 상태였을 것이다.


그는 "찐 노동자 출신이 학출 노동자와 혼인하여 고양된 삶을 살게 됐다."라고 말하면서, "그녀는 본인의 삶에 감당할 수 없는 자리에 올라섰고, 지금 발이 공중에 떠 있다.", "제정신이 아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쯤 되면 유시민 본인의 발은 어디에 두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다. 그의 말은 여성을 남편의 스펙으로 해석하고 노동자는 감히 대선 후보 배우자가 되면 안 된다는 식의 1980년대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 같은 전래동화급 고전적 계급주의에 가까웠다. 학력과 삶의 품격을 연결 짓는 표현까지 곁들이면서 유시민의 발언은 사회적 편견 종합선물세트가 되어버렸다. 물론 이 선물을 받는 사람은 기분이 더럽겠지만.


물론 비판은 폭죽처럼 즉각적으로 터졌다. 좌파, 우파 가릴 거 없이 모두가 비판했다. 좌, 우가 이렇게 신속하게 합의에 도달한 적이 있었을까? 이 정도라면 한겨례와 조선일보가 공동 사설을 쓸 것 같다. 나아가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사람들조차도 "이건 좀 아니다."라는 발언과 함께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다. 여기서 행복한 사람은 치과의사뿐이겠지.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다. 유시민 씨가 비판을 받자, "말이 좀 과했다." 정도로 수습할 법도 한데, 학생운동 시절부터 쌓아온 회피 스킬을 선보였다. 그는 '내재적 접근법'이라는 말로 책임으로부터 회피한 것이다.



내재적 접근이란 위험한 변명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태도와 그 사람의 내면을 리모컨으로 조종하듯 해석하고 판단하는 건 전혀 다른 얘기다. 한쪽은 공감이고, 다른 한쪽은 심리학자 코스프레를 한 독단의 영역이다. 유시민은 자신의 발언을 내재적 접근법이라고 명명했다. 본래 내재적 접근법은 타인의 삶의 배경, 가치 체계, 시선 속에서 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해 보려는 겸손한 시도다. 그런데 유시민은 이걸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으나, 내재적 접근법이라는 이름으로 심리 분석 보고서를 써냈다. 심리학 학위도 없는데 말이다.


유시민은 설난영 씨가 찐 노동자 출신이며, 대학을 나오지 않은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런 그가 학출 노동자와 혼인함으로써 고양되었다고 진단했다.. 고양..? 고양이는 보통 혼자 잘 산다. 사람의 삶은 그렇게 포켓몬 진화처럼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시민의 분석은 그 어떤 의도와 관계없이 계층과 학력의 위계를 정교하게 깔고 있다는 데 있다. 이는 마치 "저는 고졸 노동자 여성을 차별하지 않았어요. 그냥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여서 그렇게 말했을 뿐이에요."라고 말하는 꼴인데, 여기서 변명을 한다는 게 참 대단하다.


게다가 그는 "그녀가 그렇게 느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정도면 한 사람의 감정까지 읽어주는 슈퍼 AI 자비스인 줄 알겠다. 그녀의 감정은 그녀만의 것이다. 그런데 왜 유시민이 대신 느끼고 해석하고 결론까지 내려주는 걸까? 무당이라도 되려는 걸까? 지식인의 언어가 공론장에 던져지는 순간, 이는 단순한 의견이 아니라 하나의 규정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이 규정은 대중의 상식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본인은 모르고 있었던 걸까? 이쯤 되면 지식인이라는 수식어도 반납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지식인 수식어 보증금이 있다면 받을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 큰 문제는 유시민의 태도에 있다. 그는 비판이 거세지자 약간 유감을 표했다. 그런데 그 사과는 어딘가 이상했다. "'제정신이 아니다.'라는 말은 사실 '합목적적 이성적 판단이 안 된다'. 는 의미였어요." 이거 참.. 야신시대 시절이었으면 유시민 강냉이는 단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시대를 잘 타고난 사람이다. 이건 "넌 바보 멍청이야."라고 공격해 놓고, "사실.. 그건 판단력이 조금 떨어진다는 의미였어."라고 말만 바꾸는 격이다. 사과를 하는 것처럼 해놓고 단어를 재가공하고, 의미의 윤곽선만 교묘하게 수정해 놓고 자신의 의견을 단 하나도 굽히지 않았다.


그렇게 유시민은 반성, 사과가 아닌 변명과 재포장을 택했다. 비판받으면 반성할 줄 아는 게 상식인데 말이다. 그는 반성보다 단어 리브랜딩에 열중했다. 어쩔 수 없지. 베스트셀러 작가로 오랫동안 살아야 하니까.

사람들이 "유시민 씨 참 무례하시네요?"라고 하자, "아뇨, 이건 철학적 해석입니다."라고 맞받아친 셈이다.



개념 오용을 통한 폭력 합리화


유시민의 문제는 태도만이 아니다. 개념을 오용했다는 데 있다. 이는 마치 페인트 붓으로 사람의 맥을 짚으며, "변비가 있으시군요."라고 말하는 꼴이다. 유시민은 설난영 씨를 두고 "제정신이 아니다."라는 말을 "합목적적 이성적 판단이 안 된다는 의미"로 바꾸었다. 텍스트만 보면 똑똑해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뜯어보면 이상한 말이다. 정치학자 막스 베버는 이런 곳에 쓰라고 이 개념을 만든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가 말한 합목적성이란 특정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을 이성적으로 고르는 능력이다. 다시 말해, "치킨을 먹으려면 일단 돈을 벌어야 되겠네."와 같은 전략적 사고지, 누구의 정신이 온전한지 판별하기 위한 정신 감정을 위한 개념이 아니다. 막스 베버가 살아 있었다면, 유시민을 저격하기 위해 페이스북에 장문의 글을 썼을 텐데 참 아쉽다. 200살까지 살면 참 좋았을 텐데.


유시민이 주장한 "합목적성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한다"라는 말은 정신고양으로 연결시킬 수 없다. 다시 말해, 합목적적이지 않다는 걸 비이성적이거나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유시민은 "제정신이 아니다."라는 비하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합목적적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의미였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개념의 의미를 전도시킨 꼴이다. 마치 사회과학과 심리학을 동일한 카테고리에 묶는 놀라운 논리의 유연성을 발휘한 것이다.


유시민은 내재적 접근법이라고 포장하였으나, 실제로는 투사적 진단에 가깝다. 다시 말해, 유시민은 내재적으로 접근한 게 아니라 타인의 행위와 발화를 자신의 가치 구조와 인식체계 내에서 해석한, 자신의 경험과 추측에 기반한 투사적 진단인 것이다. 그는 과거 살난영씨와의 교류, 김문수 후보와의 사적 관계 등을 근거로 하여 "그녀는 그와 혼인함으로써 인생이 고양되었고, 지금의 자리는 감당 불가능한 자리"라고 단정 지었다. 이건 내재적 접근이 아니다. 개인의 내면을 주관적으로 구조화, 의미화하여 특정 방향으로 재단한 외재적 독단이다. 유시민이 주장한 내재적 접근 원칙과 명백히 어긋나 있다.


그는 본인이 한 말에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하여 "제가 그렇게 느낀 게 아니고 그녀가 그렇게 느꼈을 거라 생각한 겁니다."라고 주장했다. 이건 해석이 아니다. 이 정도면 유시민은 타인의 감정을 몰래 다운로드할 수 있는 신묘한 해킹 기술을 갖고 있는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사실 무언가를 해석할 때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 한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진정한 시도는 일정 거리와 판단 유보 그리고 성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시민은 적정한 거리도, 유보도, 성찰도 없이 임해놓고 내재적으로 접근한 해석이라 했다.



내재적 접근은 어떻게 해야 할까?


유시민 씨가 진정으로 설난영 씨를 내재적으로 접근하여 이해하려 했다면, 자신의 감정과 동일시할 게 아니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어야 했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려는 시도는 좋다. 그런데 신발도 안 벗고 뛰어드는 방식은 어느 내재적 접근 방법인가 참 아이러니하다.


내재적 접근을 통한 해석이라는 것은 타인의 말을 귀로 듣고, 심장으로 받아들이는 감성 에세이 같은 게 아니다. 한 사람의 말과 행동을 하나의 텍스트로 간주하고 조심스럽게 해석하는 작업에 가깝다. 다시 말해, 타인의 의도나 내면을 즉자적으로 파악하려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보여주는 발화나 행동을 하나의 텍스트처럼 간주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조심스럽게 탐색해야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는 타인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으며, 타인의 말과 행동은 단지 기호(sign)로만 주어질 뿐이기 때문이다. 만약 해석자가 단번에 그 기호를 이해했더라도 퀴즈쇼처럼 "정답!!"을 외치는 게 아니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기 성찰 및 반성을 통해 다층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이건 단순한 신중한 태도가 아니다. 타인의 주체성에 대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예의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의 인생을 해석할 때는 조금만 더 조용히, 조금만 덜 확신을 갖고 임해야 하는 것이다. 지식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시민들은 지식인을 보고 배우기 때문이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시도도 좋다.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저 사람이 왜 저럴까" 정도는 고민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그 생각을 해석으로 바꾸고, 해석이 판단으로 탈바꿈한 다음, 진실처럼 포장되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가짜 뉴스가 생성되는 것이다. 유시민은 이런 원칙을 대놓고 어겼다. 그는 설난영 씨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감정선과 심리 상태를 하나하나 풀어내더니, 결국에는 "그녀가 고양된 삶을 살고 있으며, 남편을 우러러보는 관계이기 때문에 비판적 거리를 둘 수 없고, 그 위치는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우며, 정신적으로 균형이 무너질 수 있다."라고 진단했다. 그렇게 본인의 판단을 진실인 것처럼 둔갑시켰고, 이를 이해라는 말로 포장했다. 해석을 오용한 것이다. 이 정도면 공개 상담도 아닌데, 진단서를 세 장이나 발급해 준 꼴이다. 그런데 심리학 학사 학위도 없잖아.


지식인에게 개념이라는 것은 단순한 설명 도구가 아니다. 지식인이 던지는 말 한마디는 시민들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렇게 말했다. "지식인의 말은 상징 권력이자, 정당화 투쟁의 무기이다." 다시 말해, 지식인이 단어 하나를 선택할 때는 제비 뽑기처럼 단어 고르기 문제가 아니다. 어느 방향으로 시민들의 사유 지도를 그릴지 결정하는 정치적 행위이기도 하다.


다시 유시민으로 돌아가자면, 그는 내재적 접근이라는 멋들어진 말을 꺼내 들며 말했다. "나는 이해했을 뿐 판단하지 않았어요." 말만 들으면 참 훈훈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해라는 말 뒤에 명백한 평가와 단정이 따라붙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말은 관찰이 아니었다. 마치 "나는 설난영 여사를 그 누구보다 잘 알아요." 같은 형식의 해석 독점이었다. 타인을 해석하고 규정짓고, 그 위에 자신의 언어를 올려 이름표까지 붙이는 일을 한 것이다. 그렇게 설난영 씨는 "삶을 감당 못하는 사람", " 정신적 균형 상실 가능성"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것이다.


유시민은 자신의 발언이 어떤 구조를 만들고, 어떤 관점을 주입하고, 어떤 사람의 존재를 어떻게 축소시키는지까지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가진 영향력은 "나는 그냥 그렇게 생각했을 뿐" 정도로 넘길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는 마치 트럭 운전사가 고속도로에서 "핸들만 살짝 돌렸을 뿐인데 레이와 모닝이 날아갔어요."라고 말하는 꼴이다. 트럭의 크기도 모르고 핸들을 맘대로 꺾는 건 그 자체로 사고다.



이해보다 침범, 반성보다 변명


지식인의 말 중 평론은 단순한 언어유희가 아니다. 단어로 하는 가벼운 정치적 줄다리기도 아니다. 지식인의 말에는 사회적 책임을 동반한다. 유시민이 보여준 내재적 접근은 애초에 타인의 내면을 온전히 알 수 없다는 전제 하게 이루어졌어야 했다. 인간의 내면은 그리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다. 유시민은 정신의학과 의사도 아니며, 심리학 학사 학위도 없다. 심지어 심리학 책을 완독 했는지도 의심스러운 수준인데, 설난영 씨에 대해 다양한 평가를 해냈다. 정신과 의사마저도 개인이 처한 삶의 조건, 사회적 위치, 역사적 맥락은 결코 단 하나의 관점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유시민은 과거의 친분과 얄팍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녀의 현재까지 진단하고 평가했다. 이는 단순한 이해가 아니다. 권력화된 지식인의 일방적 해석이다.


더 큰 문제는 유시민은 사과보다 자신의 논리를 설명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건 제가 잘못한 것 같다."라는 말과 함께, 그는 여전히 자신의 접근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었는지 설파하며 여론이 본질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누가 본질을 왜곡한 걸까? "내가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 그녀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라는 유시민의 말이 그 어떤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내재적 접근 자체는 죄가 없다. 이는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아주 좋은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유시민의 문제는 내재적 접근을 출발점이 아니라 도착점으로 봤다는 데 있다. 그의 말은 ”나는 내재적으로 접근했어, 나는 설난영 씨의 심리를 다 알아. 그리고 내가 그걸 알려줄게“ 정도인 것이다. 이건 이해가 아니다. 그렇게 그는 ”나는 판단하지 않는다. 이해할 뿐이다." 정도의 어줍잖은 말로 자신을 비판 너머의 안전지대로 도피시켰다. 하지만 이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방적 판단은 또 다른 형태의 지배이자, 지식인의 권위를 도구 삼아 타인을 해석한 방식은 권위주의적 꼰대이자, 독재자에 가깝다. 마치 북한의 김정은이 간부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해 감정 도청 장치와 몰래카메라를 달아놓은 것에 가깝다. 그런데 감정 도청 장치도, 감정 몰래카메라도 SF영화에나 있지 현실에는 없잖아. 만약 있더라도 그걸 허락 없이 설치하고 마음대로 공개하는 것은 불법 아닌가?


설난영 씨의 삶은 누구의 시점에서 해석되어야 할 필요도 누군가의 관점으로 재구성될 필요가 없다. 그녀가 과거 어떤 노동조합에 있었고, 누구와 결혼했으며,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는지는 그녀의 서사일 뿐이다. 유시민은 이 서사를 자신의 감정과 결합하여 분석하면서, 정작 그 삶을 존중하려는 태도를 코딱지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그렇게 느꼈을 것"이라는 자신의 해석을 합리화하며 책임을 회피할 뿐이었다. 과거 검찰이 노무현재단과 가족의 계좌추적을 했다는 허위사실 공표하여 형사재판에서 벌금 500만 원, 민사재판에서 한동훈에게 3,000만 원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을 때처럼 말이다.


유시민은 정치에서 은퇴했지만, 공론장에는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여전히 강력한 레퍼런스로 작용하고 있으며, 그의 말 한마디는 여전히 사람들의 입장을 정렬시키거나 흔들어 놓는다. 그렇기 때문에 유시민은 지식인이라는 이름표에 걸맞게 더 조심스러워야 했고, 더 깊게 사유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여성과 노동자를 향한 비하, 학력 차별에 대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관되게 변명했다. 그런데 그 말이 누군가를 그렇게 규정하는 해석의 출발점이 되었다면, 그건 생각하지 않은 게 아니라 말을 책임지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발을 밟아놓고, "난 밟으려고 한 게 아니야."라고 말하는 꼴이다.


내재적 접근이라는 방패를 든 모습은 책임을 짊어지는 게 아니라, 언어 속에 숨어버린 지식인의 초라한 모습이다. 어쩌면 그는 반성이라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것일 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이 만든 이미지에 금이 갈까 두려워서 반성을 하지 못하는 것이겠지.


그의 지식과 말은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 하지만 지식은 본래 진실을 밝히는 도구이지. 누군가를 축소하고 재단하는 데 쓰는 흉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번 사태는 유시민이 지식인의 책임을 얼마나 가볍게 여겼는지를. 그리고 자신의 해석적 권한을 얼마나 무비판적으로 과도하게 휘둘렀는지를 그대로 드러낸 꼴이다.


이해라는 말은 공감과 존중 위에 있어야 한다. 그건 누군가의 감정에 침범하려는 행위가 아니라, 그 경계 앞에 멈춰 설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유시민은 타인의 입장을 말하는 척하면서 결국 자신의 세계관을 그 위에 덮어씌웠다. 그건 이해가 아니라 착각이며, 접근이 아니라 침범이다.


이제 유시민에게 필요한 것은 또 다른 해명도 말도 아니다. 침묵 속에서 스스로 사유할 줄 알아야 한다. 이제는 내재적 접근이라는 가면 뒤에 숨을 게 아니라, 가면을 벗고 타인의 삶 앞에서도 겸허하게 설 수 있어야 한다.


유시민은 지식인이 아니라, 정말 나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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