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 한 판을 사며 든 생각.
운동 5일 차, 나는 커다란 부작용을 앓고 있다.
부작용 중 하나는.. 지금의 나는 무적에 가깝다는 것 .저번주까지만 해도 몸이 무겁고, 쌀 포대처럼 질질 끌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다르다. 발걸음은 가볍고 가슴이 조금 더 펴진 것 같다. 어깨는 한층 더 넓어졌다. 어깨너비를 실측해 보니 0.0001mm도 변하지 않았다. 뭐지? 분명히 변했을 텐데.. 내가 잘못측정한 거겠지!! 난 수학을 못하니까1!@
이 상태라면 그 누구와 맞장떠도 이길 수 있다. 캡틴 아메리카? 방패만 집에 놓고 오면 내가 이긴다. 약물 빨 받은 슈퍼솔저라고 하지만, 나의 순수한 의지력과 5일 치 땀으로 쌓아 올린 근력이면 아무것도 아니지. 만약 방패를 챙겨 온다면? 그때부터 사이좋게 지내야지 뭐 어쩌겠어. 하지만 아이언맨은 예외다. 무적인 나여도 아이언맨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지. 그러니까 아이언맨 빨리 부활해서 어벤져스로 돌아와 ㅠㅠ
운동 5일 차가 되니 마음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달라진 것 같다. 혈액순환이 잘되니 머리가 맑아지고, 머리가 맑아지니 머리가 핑핑 잘 돌아간다. 평소에 떠오르지 않았던 아이디어들이 이제는 팝콘처럼 팡팡 튀어나오고 있다. 팝콘.. 정말 맛있지. 그래서 나는 머릿속에서 튀어나오는 팝콘들을 주워 먹느라 정작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몸이 너무 근질거린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다리가 저절로 들썩이고, 손끝까지 뭔가 에너지가 넘친다. 내가 운동을 덜 해서 그런가? 그러다 문득 창밖을 보니 달리고 싶어진다.
아~~ 어렸을 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때였으면 매일마다 달리기 놀이했을 텐데. 그러면 지금 즈음이면 마라톤 선수가 되었겠지? 달리면서 일도 하고 돈도 벌고 얼마나 좋아. 그러니 꼬맹이들아... 어릴 때 많이 달려라. 물론 지금 뛰라고 해도 안 뛰겠지만, 나중에 달리고 싶어도 달릴 시간이 없단다~~~
계란 한 판을 사고 집으로 가는 길. 오늘따라 날씨가 좋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하늘도 깨끗하다. 이 평화로운 길을 걸을 때면 괜히 거창한 생각이 떠오른다.
'지금 내 앞에 캡틴 아메리카가 나타난다면, 나는 주먹질과 발차기 중 무엇을 먼저 할까?'
그러던 중 내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온몸이 천연 곱슬에 덥수룩한 털북숭이
순간 눈이 마주쳤다.
찡따맨 : 뭐냐 댕댕이? 혹시 내가 두렵나?
운동 5일차인 내 존재감이 너무 강한 걸까?
아니면 내 손에 들린 계란 한 판의 위엄 때문인가?
천연 곱슬 털북숭이는 몸을 작게 웅크리며 나를 바라봤다
찡따맨 : 흰머리가 많은 걸 보니… 노견이군.
노견.
삶의 깊이를 아는 존재.
젊은 개들이 아직 모르는 고독과 여유를 가진 자.
그렇다면, 나는 존중을 표해야 한다.
찡따맨 : 걱정 마라! 나는 노약자는 건들지 않는다. 그럼 20,000
노견 : ....
노견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아마 지금 쯤 오줌 지리고 있겠지. 모른 척해줄게 노견. 요실금일 수 있으니까..
나는 발걸음을 옮기며 마지막으로 한마디 던졌다.
찡따맨 : 어이, 노견! 노후 준비… 잊지 마… 기억해…!
그러자 녀석은 가만히 나를 보더니 아주 살짝, 아주 미세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짜식.. 귀엽긴.
그것보다 나는 분명 집에서 단백질 보충하려고 계란 한 판을 사 왔는데, 왜 치킨이 먹고 싶은 걸까? 이것도 운동 부작용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