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상대주의를 넘어야 할 때
역사야 그만 좀 속삭여라
역사란 무엇일까? 이미 죽은 사람들과 사건의 나열일까. 어쩌면 역사는 도전하는 자들을 위한 기록일 지도 모른다. 역사에 기록된 실패, 저항, 비장한 실수도 다르지 않다. 실패와 희망, 저항과 침묵, 폭력과 이상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나오는 질문은 "무엇이 옳은가?"이다. 하지만 이 질문조차 무색해진 시대가 요즘이 아닐까.
다가오는 대선을 앞두고 있는 지금. 또 한 번의 선택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그 선택은 흐릿해진다. 진실과 거짓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정체성과 이념은 개인의 취향으로 환원되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가치가 상대화되는 시대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상대주의라는 짙은 안갯속에 갇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역사는 조용히 속삭인다. 상대주의만으로는 세계를 이해할 수도 바꿀 수도 없다는 것을. 물론 요즘 많은 사람들은 이어폰을 낀 채로 생활하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했어?"라고 되묻기 바쁘다. 그럼에도 역사는 끈질기게 외친다. 상대주의만으로는 세계를 이해할 수도 바꿀 수도 없다는 것을. 역사의 맥은 실존적 고민에서 사회 변화 그리고 인간 존재 전체를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 멋진 역사조차 정파의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정도로 축소시켜 버렸다. 좌든 우든 다를 바 없다.
고로 이 시점에서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강력한 도구인 역사를 우리가 정말 제대로 마주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장가처럼 그냥 흘려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볼 때다.
박물관으로 사라진 변혁
몇몇은 변혁 또는 혁명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외친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은 이제 손에 닿지 않는 기념비로 변했으며, 체 게바라의 꿈은 티셔츠 프린트 위에서나 반짝일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 변혁이니 혁명이니 같은 말들은 기호적 소비로 전락할 뿐이다. 소위 세상을 바꾸겠다고 말하는 어느 정치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무엇을 어떻게 바꾸는 것인지조차 선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좌파도 우파도 사유하지 않는 것일 지도 모른다. 구조적인 불평등 같은 단어만 꺼내도 곧바로 '너는 편 가르기 하는군.'라는 스티커를 이마에 붙여버린다. 심지어 정책이라는 건 '공정'이라는 포장지에 싸여 있는데, 막상 그걸 열어보면 내용물은 텅 비어 있기 마련이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누구를 위한 국가인가?
샤르트르는 "식민지 민중의 폭력은 인간 자체를 재구성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식민지의 민중들이 들고일어나는 폭력은 그냥 박살 내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다시 사람답게 만들고자 하는 몸부림인 것이다. 이 말이 다소 격하게 들릴 수 있지만, 지금의 우리는 더 나은 인간에 대한 상상조차 두려워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냥저냥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 된 지금, 인간다운 삶은 언제나 다음 페이지로 밀리기 마련이다.
대선은 정치적인 선택일 뿐만 아니라, 꽤 윤리적인 결단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국가, 어떤 사회, 어떤 인간으로 거듭나고 싶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체성 정치, 유행하는 슬로건, 무한 복붙 공약들로만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정치는 마케팅을 넘어, 생각의 영역이어야 한다. 고로 다시 질문하고 고민할 줄 알아야 한다. 어쩌면 이 출발점이 상대주의를 넘어서려는 몸부림일 지도 모른다.
이어지는 잡념
사실 이런 생각은 꽤 오래전부터 해왔다. 여담이지만, 우리 아빠는 공직에서 출세하지 못한 좌절감 속에 한동안 침잠해하셨다. 그 시절 나는 다소 주제넘게 아빠에게 구두 한 켤레와 편지를 건넸다. 구두 브랜드는 처치스(Church’s).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가 자주 신었다는 그 구두.
물론 토니 블레어에 대한 찬반은 갈릴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진부한 좌우 이념 염증을 느낀 대중들에게 '제3의 길'을 제시했다. 나는 그 구두에 작지만 진심을 담은 편지를 남겼다. 편지 내용은 대충 이렇다.
"지금 발을 딛고 계시는 곳이 아빠의 전체 세계는 아닐 겁니다. 이 구두를 신고 토니 블레어처럼, 제3의 길을 마주할 수 있길 바랍니다. 사실 제3의 길은 길 그 자체가 아니라, 새로운 길을 만들겠다는 의지일 지도 모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가 뭐라고 인생 선배의 삶에 훈수를 두는지.. 건방지기 짝이 없다.)
과거 나에게 제3의 길이라는 슬로건은 특별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늘 두 가지 중 하나만 고르라고 강요받는다. 이분법 속에서 그 둘 중 어느 쪽도 진심이 아니거나, 어느 쪽도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은 묻히기 마련이다. 사실 대한민국의 정치는 꽤 오랫동안 이런 식으로 굴러왔다. 하지만 대중은 언제까지 이 흐름을 언제까지 순진하게 따라가기만 할 것인가.
누군가는 우리 사회에 제3의 길을 제시할 정치인이 없을 거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많다. 제3의 길이 아니어도 신뢰와 정직이라는 길을 묵묵하게 걷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길을 걷는 한 사람의 태도가 거대한 정치보다 더 깊은 감동을 줄 때가 있다. 환경부 공무원이었던 김법정 씨는 내가 기억하는 멋진 공직자 중 한 명이다. 그는 미세먼지 문제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일부 공무원들은 "열심히 했음에도 성과가 없으면 국민들에게 망신만 당할 것."이라며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가 모든 걸 걸고 싸운 끝에 실패했다면, 오히려 국민이 우리를 이해해 줄 것입니다." 라며 답했다.
이 말은 단순한 직업윤리를 넘어 정치의 본질을 꿰뚫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정치는 결국 신뢰의 문제다. 상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고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고백할 때 진정한 신뢰가 피어나는 것이다.
잡념 2 가짜 뉴스 시대의 절망과 희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가 경직된 이유는 정보 자체가 이미 상대화되어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2024년 말 나는 꽤 당황스러운 경험을 했다. 국내 유수 경제지의 인턴 기자가 사실을 왜곡하고 가짜 뉴스를 유포하면서 문제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가짜 뉴스에 휘둘리는 건 정보 접근성이 낮은 고령층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2030 세대 일부는 그 뉴스를 교묘하게 인용하여 신념처럼 생산하고 소비하는 꼴이다.
그저 다행이라면 그 청년은 기자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더 근본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언론이 진실을 다루지 않을 때, 정치적 판단도 흐릿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상대주의를 넘어서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든 시각을 다 인정해 버리면 진실은 가장 큰 목소리에 묻혀버리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절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과거 우리 또래인 주간조선 기자와 40분간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사실 '조선'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었기에 보수적 색채가 강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사람을 만나고, 기록하고, 현장에서 목소리를 담으려 애썼다. 그녀가 전한 이야기는 어느 한쪽의 시선이 아니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었다. 좌파도 우파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삶의 진실이 담긴 이야기였다. 그때 나는 확신했다. 진짜 언론이 기능하다면 진짜 정치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시스템이 아니라 태도다. 그것이 우리가 상대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아~ 벌써 5시 20분이라니 시간이 왜캐 빠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