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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적 대통령 시대에서 제왕적 국회의원 시대

파시즘의 그림자 : 책임 없는, 견제받지 않는 권력

by 찡따맨

이번 탄핵의 본질은 입법권력의 극대화, 국회의 오만한 민원청탁 구조, 그리고 이에 반기를 든 대통령과의 충돌이었다. 이 시점부터 대통령제의 왕관은 벗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대중들의 시선은 여전히 대통령에게만 고정되어 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실제 권력은 용산이 아닌 여의도에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넘어서야 한다는 말은 이제 헌책방 구석에 처박힌 헌책 표지만큼이나 빛이 바랬다. 대한민국은 두 명이나 대통령을 탄핵했음에도 이와 같은 레퍼토리가 나오고 있다니. 이쯤되면 보안을 위해 플로피 디스크를 다시 사용하자는 말이 더 신선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가 넘어서야 할 건 무엇일까? '제왕적 대통령제'가 아니라, '제왕적 국회의원제'다. 물론 이 말을 입 밖에 내는 국회의원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맥도날드가 자기 자신을 정크푸드 기업이라 부르는 것과 비슷하니까.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당했을 때, 언론과 정치권은 '제왕적 대통령제'가 거대한 괴물을 잡았다며 환호했다. 그런데 그 괴물이 어쩌면 용산이 아니라 여의도에서 웃고 있었던 것일 지도 모른다. 이번 탄핵의 본질은 입법권력의 극대화, 국회의 오만한 민원청탁 구조, 그리고 이에 반기를 든 대통령과의 충돌이었다. 이 시점부터 대통령제의 왕관은 벗겨지고 있었다.


대통령이 권력을 남용하면, 헌법재판소가 탄핵시킨다. 하지만 국회의원이 입법권과 면책특권을 남용하면? 대부분의 경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도 견제하지 않는다. 마치 비오는 날 신발 젖은 걸 보고도 '말리면 그만이지.' 정도로 넘기는 것처럼.


국회의 자정능력이 존재하나? 이론적으로는 존재한다. 하지만 검찰 수사가 진행되려고 하면, 정치탄압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언론은 이미 이러한 관행에 익숙해 둔감하고, 시민사회는 무기력하다. 그렇게 국회의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구조가 오늘의 사태를 초래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탄핵 이후의 정치는 사실상 국회 중심체제로 움직이고 있다. 행정부의 고위직 인사 하나도 국회의 뜻을 거스르면 나아가지 못하고, 수많은 정책이 입법화되기도 전에 국회의원 개개인의 민원과 청탁, 지역구 이익의 필터를 거쳐야만 한다. 대통령은 하루에 수십 번, 국회가 만든 예산 구조, 법률 구조에 발이 묶인다. 여기서 진짜 제왕은 누구인가?


국회의원은 '국가 이익을 우선하고, 양심에 따라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라고 헌법은 말한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대한민국 국회의원은 민원을 중개하고 있는 브로커에 가깝다. 그리고 공적 이익보다 사적 이득을 우선시하는 권력자라 하여도 무방하다. 이들이 공공기관에 전화를 걸어 "이거는 조금 도와주세요." 라고 말하면, 공무원들은 고개를 숙이고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그 말 한 마디가 예산을 뒤흔들고, 정책을 바꾸고, 사람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매년 수백 건의 감사원 감사, 언론 비판, 시민단체 감시 속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국회의원은 어떤가? 검증은커녕, 특권을 앞세워 수사를 막고, 언론의 공격을 정치적 음해라며 되받아친다. 면책특권이라는 방패 뒤에서 거침없는 말과 행위를 반복하고, 심지어 형사처벌조차 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쩌면 현재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는 건, 제왕적 대통령제가 아닐 지도 모른다. 제왕적 국회의원제가 가장 큰 문제일 지도 모른다. 대통령이 임명한 인사가 국회 청문회를 넘지 못해 낙마하고, 여야 합의 없이는 국가 예산 하나 편성할 수 없으며, 대통령의 의지라는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다.


문제는 이 제왕적 국회의원제가 대의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민심을 대변한다는 명분은 언제나 옳으며, 그 속에 감춰진 이해관계조차도 정당화된다. 그런데 민심이 항상 옳은가? 민원인으로서의 유권자들은 자신들의 청탁이 관철되지 않으면 분노하고, 그것이 관철될 때만 정의를 외친다. 결국 국회의원은 정치인이기 이전에 민원을 들어주는 서비스업자로 전락한 셈이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보편적 가치가 무너진 자리에 파시즘은 신화적 권위로 침투한다”고 경고했다. 제도의 틈새를 파고든 자들이 스스로를 민의의 대변자라 칭하며, 책임 없는 권력을 휘두를 때, 그 공간은 이성의 질서가 아닌 선동과 권위의 질서로 채워진다. 이 지점에서 대한민국 국회 권력의 비대한 실루엣이 드러난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는 무자비한 폭군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관료, 명령에만 충실한 개인으로부터 발생한다." 현재 대한민국 국회가 그렇다. 민심을 말하지만 민의를 두려워하지 않고, 법치를 말하지만 법 위에 군림하며,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 속에서 권력은 서서히 파시즘적 징후를 띠어간다.


대한민국의 진정한 민주주의는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하는가? 가장 먼저 입법권력의 과도한 팽창을 경계해야 한다. 고로 국회의원 개인의 민원 청탁을 법으로 금지하고, 그것을 감시할 시스템을 제도화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회 역시 대통령처럼 매년 감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나아가 의원 개인도 공직자윤리법상 재산 공개, 이해충돌 심사, 비리 전수조사 대상이 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박근혜의 무능에 실망했고, 윤석열의 무리한 권력 행사에 분노했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의 본질은 무엇인가? 아무도 견제하지 않는 국회에 있었다. 이들은 어느새 한 나라의 대통령보다 강하고, 더 오래 살아남으며, 더 많은 권력을 누리고 있다.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면 한낱 민간인이 된다. 하지만 국회의원은 낙선해도 다음 선거에서 지역 민원을 등에 업고 다시 부활한다. 단임의 제왕은 물러가지만, 재선 가능한 제왕은 영원히 살아남는다. 현재 대한민국은 제왕적 대통령 시대는 지나갔지만, 제왕적 국회의원 시대는 아직까지 무너질 줄을 모른다.


대통령은 책임을 진다. 탄핵된다. 감시받는다. 그러나 국회의원은 살아남는다. 되돌아온다. 다시 자리를 되찾는다. 그리고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들이 쌓아온 권력의 거대한 섬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제는 국회의 시대를 개혁할 때다.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하자는 논의가 헌법 개정의 중심이었던 시대를 지나, 지금 우리는 국회의 권한을 제한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보다 훨씬 은밀하고, 더 위험하며, 체계적으로 뿌리내린 제왕적 국회의원제가 우리 민주주의를 좀먹고 있다는 것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는 대통령 한 사람의 권력 축소로 완성되지 않는다.

국회의 권력을 투명하게 만들고,

그 권력의 제왕들을 평범한 시민의 감시 아래 두는 것.

그것이 우리가 향해 가야 할 시대의 과제일 지도 모른다.




그것보다 매번 섹스섹스 외치다 이런 글 쓰니까 조금 그렇네;;

다음에는 무슨 글 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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