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 스며든 파시즘 냄새
"파시즘은 군화 소리가 아니라 웃는 얼굴로 온다."
독일의 작가 잉게 슐의 말이다.
현대 사회에서 파시즘은 군사 퍼레이드나 깃발이 아닌, 상식과 질서라는 이름으로 우리 일상 속에 스며들고 있다. 한국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한 포용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그 빈자리를 도덕적 우월감이나 사회적 배제로 채우고 있다. 그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다름에 대한 탄압이 일상화되는 것이다. 소수자를 향한 혐오, 반대 의견에 대한 폭력적 배제, 익명 공간에서의 집단 린치, 그리고 이를 부추기거나 방조하는 언론과 정치적 프레임. 이 모든 것은 파시즘적 정서의 표면적인 증상이다.
소위, 파시즘이라 하면, 2차 세계대전기의 나치 독일이나 무솔리니 이탈리아를 떠오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파시즘은 단순 군사독재나 민족주의로만 환원될 수 없다. 정치학자인 로버트 팩스턴은 파시즘을 "국가적 재생을 위한 감정적 호소에 기반한 반민주적 대중운동"이라 정의한다. 고로, 현대사회에서의 파시즘이 꼭 군사적 혹은 일당독재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으며, 오늘날 파시즘은 더욱 교묘하고 비가시적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예를 들면 권위를 절대화하고, 사회 내부의 적을 설정하며,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권리를 억압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파시즘은 한국 사회의 다양한 층위에 존재한다.
한국 사회의 파시즘적인 경향은 역사적 기저에 뿌리내리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기를 거치며 뿌리 깊게 형성된 권위주의 문화, 윗사람에 복종하고 다수에 동조해야 안전하다는 심리 구조는 파시즘적 사고를 자연스럽게 만든다. 여기에 유교적 질서관이 결합되면 더욱 견고해진다. 질서와 위계, 체면과 예의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그려지는 일종의 도덕적 정당성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 규범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비정상 또는 문제적 존재로 낙인찍히기 마련이다.
언론 역시 한국 사회에 파시즘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이해할 수 있다. 그래야 잘 팔리니까. 가짜뉴스를 시작으로 편향된 보도, 정파적 논쟁은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고,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이분법으로 재단한다. 특히 TV 토론이나 포털 뉴스 댓글 문화는 생각하지 않고 분노하는 구조를 강화하는 데 일조한다. 그리고 대중은 이러한 미디어 프레임에 길들여진다. 적을 설정하고 영웅을 만들고, 반대자를 침묵시키려는 내러티브는 파시즘적 상상력의 핵심이다. 이는 단지 정치 영역을 넘어서는 이야기다. 문화 콘텐츠를 시작으로 교육과 인터넷 커뮤니티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사회에서 다수의 이름으로 누가 침묵을 당하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왜 그런 침묵에 안도하고 있는지 말이디. 파시즘에 맞서자는 말은 거창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그리 거창한 말이 아니다. 일상의 감수성을 다시 되찾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다시 한 번 들으려고 노력하고, 소수의 존재에게 눈길을 보내며,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하지 않으려는 태도. 이 모든 것들이 일상 속 민주주의의 회복이자, 파시즘과 맞서는 가장 근본적인 노력이다.
광장, 이제는 민주주의 심장이 아닌 파시즘의 무대
우리는 광장을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떠올린다. 광장에서 말하는 시민, 스스로 나서는 국민이 자연스럽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동안 그려져 온 광장은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그곳에서는 예배와 애국가가 울려퍼지고 시끄럽게 시위를 벌이기 마련이다. 광장에 서 있는 자신을 자유민주주의 수호자라 부르지만, 그 구호 아래에는 다름을 억압하고 공격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을 뿐이다. 어쩌면 파시즘의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일 지도 모른다.
광장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세대는 단연 어르신들이다. 과거의 파시즘은 낭만주의적인 민족 신화나 영웅담을 통해 생명력을 얻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그려지는 파시즘의 기운은 노인의 두려움과 냉소 그리고 고립에서 비롯되고 있다.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노인들은 태극기를 휘두르는데, 이는 보수 집회라 볼 수 없다. 체념한 개인들이 아주 작지만 지배자가 되었다는 감각, 다시 말해 자기 존재의 회복을 광장에서 회복하려는 종교적 실천에 가깝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는 은유가 아니다. 실제 광장에 목사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치는 신앙이 되고, 신앙은 전쟁으로 이어지고 전쟁은 선악의 구도로 조정된다. 정치적 반대자는 경쟁자가 아닌, 악마가 될 뿐이다. 이성의 토론이 설 자리를 잃고 증오의 선동만이 굳건할 뿐이다. 여기서 문제는 정당과 언론 그리고 사회의 절반 가까이 이러한 현상을 비판하거나 쉽게 무시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 부분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구조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국회도 사법부도 언론도 신뢰를 상실했다. 제도는 껍데기만 있을 뿐, 내용은 공상과학영화처럼 다가올 뿐이다. 선거는 의심 받고, 국가는 해외 세력에 조종 받는 꼭두각시처럼 그려질 뿐이다. 이러한 음모론적 사고는 공포를 먹고 자랄 뿐이다. 불안한 노년과 위기의 중산층 그리고 자겨 교육에 실패했다는 죄책감, 급락하는 부동산 가치, 갈 길을 잃은 청년. 모든 것들이 현실의 원인을 찾지 않고, 추상적 적에게 분통을 쏟아낼 뿐이다. 이것이 파시즘이 피어나는 기본적인 토양이다. 개인의 불안을 집단의 적개심으로 전환시키는 구조인 것이다.
광화문 광장에서 자주 목격되는 옷차림 중 하나는 군복이다 군복의 시위대가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행진하는 모습. 이들은 대부분 대한민국 수호, 반공,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며 스스로를 국가를 위해 싸운 전사로 위치 짓는다. 이는 단순한 군복일 수 있지만 군복은 강력한 상징적 장치로 기능한다.
일단 군복은 국가 권력의 상징이다. 군은 헌법상 국가폭력의 합법적 독점자이자, 시민사회가 아닌 국가 그 자체를 대표한다. 그러므로 시위자가 군복을 착용하는 것은 곧 '나는 국가다'라는 정치적 선언과 같다. 이는 극우 세력 스스로를 '국가의 정통성'과 동일시하려는 시도이자, 민주적 시민사회와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리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러한 군복 행진은 마치 한국전쟁과 냉전기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이들에게 있어 군복은 단순 과거의 유산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정치적 무기로 작동한다. 마치 과거의 전쟁이 끝나지 않은 것처럼 그들은 '내부의 적'과 '북한의 사주를 받은 좌파'와 전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어쩌면 중국 공산당이 선거를 조작했다 같은 가짜 뉴스에 크게 반응하는 이유도 이에 기인할 것이다.
파시즘은 언어 뿐만 아니라 시각적 이미지, 복장, 행진, 구호 등 모든 것을 동원하여 정체성을 구축한다. 군복은 복장의 형태를 띠고 있는 정치적 언어이자, 그 언어는 강한 국가, 질서, 순결한 공동체 그리고 적의 발멸을 말한다. 오늘날 군복을 입은 자들의 시위 행진을 이상하다고 느낄 게 아니라, 그 행위에 내포되어 있는 정치적 상징을 더 명확하게 들여다보고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이유다.
파시즘의 위험은 언제나 보통 사람들의 절망 속에서 피어난다. 이 절망은 이해받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절망이 거짓된 구원자를 탄생시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때 우리는 더욱 경계할 필요가 있다. 보수나 진보나 정치권과 언론은 지금 광장에서 들리는 광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바라볼 게 아니라, 거기서 벗어나 말할 수 있는 이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희망은 이성에 있다. 이성이 존재한다면 진실과 책임 그리고 공통의 언어가 다시 생겨날 것이다. 그래야 사회 통합이 이루어진다. 현재 한국 사회는 진실과 책임 공통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각자의 구호 아래 광장에 모일 뿐이다. 단지 집회가 아니라 의례가 된다면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종교국가에 들어선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필요한 것은 대통령이라는 위대한 지도자가 아니라 국민의 사유, 맹목적인 믿음이 보다 의심, 숭배가 아닌 토론이다. 그래야 광장에서 촛불이든 태극기든 이성을 태우는 횃불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번 국민의힘 2차 토론에 큰 기대를 거는 이유도 이에 기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