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고전, 미래를 여는 열쇠

by 기픈옹달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말은 많다. 그러나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느냐 묻는다면 제대로 답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옛 선인들의 지혜가 담겨 있으니까. 교훈될 만한 이야기가 많으니까. 인성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까 등등. 모두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지식이 하루가 멀다 하고 생산되는 오늘날, 새로운 지식을 뒤따라가기도 벅찬데 낡은 옛 책을 뒤적일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실제로 고전을 강조하는 사람들만큼 고전의 무용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온고지신溫故知新’ 공자는 지독히도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이었다. 춘추전국의 혼란기 속에서 여전히 무너진 주周 나라를 붙들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당대 사람들에게 시대에 뒤쳐진 사람이라며 손가락질을 받았다. 실제로 당시 공자는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도는 뜨내기에 불과했다. 허나 역사는 공자를 만세사표萬歲師表, 모든 선생 가운데 으뜸으로 꼽는다. 이는 어째서일까?


그것은 생각보다 변화가 더디 오기 때문이다. <논어>는 오늘날 읽어보아도 동감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청동기시대 말, 공자의 말은 철기문명의 충격과 산업혁명의 소용돌이에도 살아남았다. 청동기에서 철기로, 이제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전자기기가 손에 쥐어졌지만 인간의 삶이란 어제나 오늘이나, 수천 년 전 공자의 시대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까닭이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더라. 진화란 그처럼 더디 오는 것이라고.


허나 그것뿐이었다면 별 흥미가 없을 것이다. ‘온고溫故’만 있지 ‘지신知新’은 없다면 고전의 매력은 크게 반감될 것이다. 어제든 오늘이든, 저 먼 공자시대든 지금이든 똑같은 말은 지겹기 마련이다. 고전이 지금까지도 살아남은 이유는 늘 새롭게 읽히기 때문이다. 새로움을 길어낼 수 있는 무한한 깊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까닭에 시대의 변곡점에 서는 사람들 가운데는 고전에 눈을 돌리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새 시대의 사유는 제 발로 찾아오는 게 아니다.


미래未來란 말 그대로 ‘아직(未) 오지 않은(來)’것을 말한다. 그래서 미래는 늘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누군가는 미래를 창조할 것이며, 누군가는 어제를 살다 갑자기 내일을 맞겠지. 미래를 여는 사람들은 어제보다 더 이전, 깊은 심연을 들여다본 사람들이었다. 서구 문명의 대전환, 르네상스는 고전을 새롭게 읽으며 시작되었다. 고대 문헌이 재발견되고 재검토되면서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 열렸다.


멀리 갈 것도 없다. 21세기의 작은 혁신가 스티븐 잡스는 ‘인문학’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이에 대해 수많은 해석이 있지만, 나는 그가 고전 - 지혜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법을 말한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옛 말을 빌리면 바탕과 근간에 눈을 돌리라는 말이라 생각한다. 모든 지식은 거저 얻을 수 없다. 지식 없이는 창조도 없다. 깊은 뿌리 없이는 높은 나무가 자랄 수 없다. 옛 지혜자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해 아래 새 것은 없나니.’ 변주와 변형이 혁신과 창조의 출발점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예측하지 못한 시대가 열릴 것이라 말한다. 하긴 10년 전 오늘날 우리 삶을 예측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스마트폰과 SNS, 웹툰과 유튜브까지. 앞으로 우리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4차혁명’이란 이런 예측치 못한 극심한 변화를 예고하는 말이겠다. 역사의 변곡점에 서있다. 다시 지혜가 필요한 시대를 맞았다. 언제든 지혜가 필요한 시대가 없었냐만은 다시 한번 심연의 지혜를 오래도록 들여봐야 할 때가 도래했다. 고전, 깊고 넓은 세계로 나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어둠속에 잠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