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땅콩의 글쓰기
청소년 글쓰기 교실에서 학생들이 쓴 글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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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은 나에게 특별했다. 여느 방학처럼 무료하게 집 바닥을 뒹굴고 더운 날씨에 몸을 헐떡이곤 했다. 햇빛이 뜨겁게 내리쬐며 바람은 이에 맞서듯이 시원하게 불던 어느 날이었다. 길거리 광고문에서 만년필을 보게 된 것이다. 이 필기구를 처음 접하는 순간이었다. 서둘러 집에 돌아오자마자 인터넷에 만년필을 검색했다. 그리고 절망했다. 난생 들어보지도 못한 단어가 난무했고 가격도 천지 만별이었다. 무엇보다도 과연 내가 이렇게 낯선 필기구를 쓸 수 있을지 두려웠다.
만년필은 불편하다. 사용하는 잉크의 흐름이 안 좋을수록 펜 내부에서 굳기 십상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2 주에 한 번씩, 나처럼 게으른 사람들은 한 달에 한 번씩은 세척해야 한다. 이 과정이 엄청 귀찮다. 만년필 잉크를 비우고 그 통을 물에 담근다. 그 이후에 몇 번씩이나 물을 넣고 비우기를 반복해야 한다. 옛날에는 너무나도 귀찮아서 6개월 동안 펜을 씻기지 않았다. 그러자 잉크가 나오지 않기 시작했다. 수리를 받기 위해 만난 점원은 “2 주에 한 번씩은 하셔야죠.”라며 아주 단호히 말했다. 그 일 이후로 세척이 귀찮을 때마다 마치 그 점원이 뒤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몸을 서둘러 움직인다.
만년필이 불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만년필은 애착이 쉽게 간다. 금속 닙이 종이를 긁는 소리, 잉크를 갈아 키우면서 나는 잉크 냄새, 종이에 서서히 번지는 글씨. 샤프나 연필을 쓴다면 잘 이해할 수 없는 매력이 많다. 그중에서도 나는 ‘길들이기’가 제일 마음에 든다. 종이에 닿는 부분을 닙이라고 한다. 이 닙은 쓰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그 모양이 변해 결국은 그 사람의 필체나 펜을 잡는 방법 등에 맞게 마모된다. 이런 과정을 ‘길들이기’라고 부른다. 이 과정을 지나면 세상에서 오직 나한테 맞는 전용 만년필이 완성된다. 이런 독특함이 좋았던 나는 첫 번째 펜을 사고 나서 빨리 길들여지기를 기다렸던 경험이 있다. 그 설렘은 아직도 잊기 힘들다. 편리한 필기구, 귀여운 필기구, 싼 필기구 등 이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필기구가 있겠지만 만년필처럼 매력적이고 독특한 펜은 찾기 힘들다고 나는 자부할 수 있다.
만년필은 비싸다. 만년필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비싸지만 그 외에 지출이 생기는 경우가 다반사다. 만년필을 샀다면 우선 잉크가 필요하다. 잉크 하나만으로는 부담이 되지는 않지만 시장에 있는 잉크의 종류가 무척 다양하다. 그래서 꼭 살 필요는 없지만 사게 된다. 처음에 24 색의 잉크색을 전부 다 맞추고 싶어서 가격을 알아보려고 한 적이 있다. 그 가격이 무려 50만 원가량이었다. 이처럼 만년필을 가지게 된다면 지출이 나가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나도 돈이 부담돼서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만년필은 쓰면 쓸수록 돈이 아깝지 않다. 이 필기구는 쓰면 쓸수록 좀 더 귀하게 느껴지고 좀 더 쓰게 된다. 나중에는 돈이 얼마나 나갔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마치 한 명의 친구처럼 조금씩 알아간다. 언제 세척이 필요한지, 언제 길들여지는지, 어느 잉크가 맞는지 천천히 알아간다.
만년필을 집는 순간 금요일 밤이 된 것처럼 마음이 가벼워진다. 닙으로 종이를 갈기는 순간 주말에 밖에서 친구와 수다를 떠는 것처럼 마음이 즐거워진다. 마지막으로 뚜껑을 닫을 때면 해가 지는 밤에 골목길에서 인사를 건네는 거처럼 마음이 붕 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