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월이야기
개인적으로 루쉰에게 작가라는 호칭은 영 걸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창작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단편 가운데 번뜩이는 작품도 여럿 있다. 한 시대의 단면을 절취하는 것은 물론, 전형적인 인간의 속내를 까발리는 점은 훌륭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외침>이나 <방황>보다는 <새로 쓴 옛날이야기>에서 이른바 문학적 세계에 대한 열정이 더 엿보인다. 그렇다 하더라도 양으로나 명료함으로나 잡문에 비할 바는 아니다.
논객이라 하면 어떨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그 역시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전사를 자처하며 그 시대에 던져진 싸움을 수행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그가 어느 전선에, 어느 대오에 있었느냐는 논란이 있겠지만 그의 말을 곱씹어 보노라면 그는 ‘전선’보다는 ‘싸움 자체’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듯싶다. 이는 그가 상대하는 적들이 끊임없이 바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거대 담론을 두고 싸우는, 진영과 진영의 싸움에 어울리지 않는다. 게릴라라고 해야 할까. 그는 기민하고 재빠르다. 그가 다루는 주제들을 보노라면 좀 어지럽기도 하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그에게 발견되는 것은 그가 별로 누군가를 상대하려 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그의 글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적들이 있으며, 때로 지면을 빌려 실명을 거론하고 이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상대를 꺾어야겠다거나 승복시켜야겠다는 식의 열망이 보이지 않는다. 때로는 상대의 말을 비껴가기도 하고, 누군가를 거론하는가 싶다 하더라도 어느새 딴 소리를 하고 있기도 하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함께 링 위에 올라 주먹다짐을 할 그런 상대는 아닌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건대 ‘그는 그의 말을 하고 있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그렇다고 제 혼잣말을 하고 있다는 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깊이 침잠하지 않는다. 그의 문장이 날카롭고 단단하되 고아하고 수려하지 않는 것도 이와 연관이 있겠다. 그는 그가 당면한 문제를 그의 말로 쓰고 있다. 덕분에 그의 글을 통해 그의 시대를 보기도 하고, 당시의 어지러운 상황을 엿보기도 한다. 그 이후를 아는 후대의 독자는, 당대의 문제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이미 알고 있다. 일본은 패망할 것이고, 그가 상대했던 지식인 가운데 여럿은 본토를 떠날 것이다. 물론 그전에 보다 극심한 전쟁의 참화를 지나야 한다는 것도.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에 주목하지 않더라도 그의 글을 읽어보면 단순히 그 시대의 특정한 문제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루쉰이 지적하는 당대의 언론, 문학계의 모습이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어느 시대건 거짓을 추동하는 목소리는 줄어들지 않는다.
이런 사건이 없으면 이레에 한 번씩 열흘에 한 번씩 폐기물을 모아 독자들의 머릿속으로 집어넣는다. 반년, 일 년 보고 나면 머릿속은 온통 어떤 권세가가 어떻게 패를 잡았느니, 어떤 배우가 어떻게 재채기를 했는지에 관한 전고典故로 가득 차게 된다. 즐거움은 물론 즐거운 것이다. 그런데 인생도 즐거움을 환영하는 이런 즐거운 사람들 속에서 끝나고 마는 것이리라. (362. <식객법 폭로>)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무력’이지 결코 이론이 아니다. 사회학이건 기독교 이론이건 간에 모두 어떤 권위를 생산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원시인의 동물에 대한 권위는 활과 화살 따위의 발명에서 생산된 것이다. 이론이라는 것은 뒤이어 생각해 낸 설명에 불과하다. 설명의 역할은 자신의 권위를 만들어 내는 종교적.철학적.과학적.세계적 조류를 근거로 들어 노예와 소, 말로 하여금 이 세계 공통의 법칙을 불현듯 깨닫게 하여 전복에 관한 모든 꿈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380. <동의와 설명>)
‘전복에 관한 꿈’, 무엇으로부터의 전복인가. 전통으로부터, 구습으로부터, 가부장제로부터, 제국주의로부터 등등. 문제는 전복 자체와 무관한 ‘노예'들이 있다는 것이다. 루쉰의 글에서는 다양한 노예를 만날 수 있다. 억압받는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억압의 구조를 힘겹게 지탱하는 사람들. <총명한 사람, 바보, 종>에서 보았듯이, 여기에는 이 억압의 구조에 함께 동참하는 ‘총명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헌데 총명한 사람은 총명할 뿐만 아니라 착하기까지 하다! 아마도 적잖이 진지하기도 할 테다.
이 선행과 진지를 깨뜨리는 것은 무엇이어야 할까. 루쉰에게 그것은 풍자라고 할 수 있다. 그들보다 더 지혜로울 수도, 더 착할 수도, 더 진지할 수도 없다면 얼마간의 미욱함과, 얼마간의 위악과, 얼마간의 가벼움으로 그들을 상대해야 한다. 이를 담아내는 말을 그의 말속에서 찾자면 ‘비평가’라고 할 수 있다.
고전적이고 반동적이며 이데올로기가 이미 많은 다른 작품들은 대개 새로운 청년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지만(물론 정확한 가르침이 있어야 한다). 그것들로부터 묘사의 재능과 작가의 노력을 배울 수는 있다. 흡사 커다란 비상 덩어리를 보고 나서 그것의 살상력과 결정의 모양 같은 약물학과 광물학적 지식을 얻게 되는 것과 같다. 오히려 무서운 것은 소량의 비상을 음식에 섞어 청년으로 하여금 부지불식간에 삼키도록 하는 것이다. 예컨대 사이비의 소위 ‘혁명문학’과 격렬함을 가장하는 소위 ‘유물사관적 비평’ 같은 것이 이런 종류들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반드시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 유해한 문학의 철책이란 무엇인가? 비평가가 바로 그것이다. (392. <번역에 관하여 (상)>
오늘날 비평가라 하면 남다른 식견과 안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뜻하는 말로 쓰이곤 한다. 그리고 이것이 특히 취향과 감각의 문제로 비친다. 예민한 감각의 신체. 루쉰 역시 그것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문제는 그 감각의 쓰임이다. 더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그의 말을 빌리면 ‘생명 진화’, 즉 생명에 도움이 되는가를 따져보아야 한다. 어떻게 이것을 따져볼 수 있을까?
청복을 누리고 추심을 품고 있는 고상한 사람과 낡은 옷에 거친 밥을 먹는 속인을 비교해보면 결국 누가 끝까지 살아가게 될지는 분명하다.(413. <차 마시기>)
생명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더 비근하게 말한다면 생명의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살아남도록,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아내의 몸에 종기가 몇 군데 났다고 해서 변호사를 불러 이혼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작가, 작품, 번역에 대해서는 늘 상대적으로 엄격하다. ... 좋은 번역이 다시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 생각에는 그래도 비평가들에게 문드러진 사과를 먹는 방법으로 응급처치를 좀 해달라고 부탁해야 할 것 같다.(396. <번역에 관하여(하)>)
좋은 것을 먹는 게 가장 좋은 일이다. 그러나 도무지 먹을 수 있는 게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문드러진 사과라도 도려내고 먹어야 하는 거다. 루쉰에게 비평가란 좋고 나쁜 것을 가려내는 사람인 동시에, 좋은 것이 없다면 적어도 무엇을 어떻게 취해야 하는지를 일러주는 사람이다. 그는 취향의 안내자가 아니라 생명과 생존의 길잡이이다.
그는 생명이라는 말을 썼지만 오늘날에 비춰보면 ‘생존’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생명이란 그 존재 자체로 숭고하며 순수한 무엇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쉰의 시대에도, 그리고 지금도 ‘돌진하기’로 쓸려 나가는 삶이 있다. 그것뿐인가. 오늘날에도 ‘음식에 섞인 비상’을 먹고 마시는 일이 일상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