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사후 공자의 명성은 점점 높아졌어요. 덩달아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 유가儒家의 수도 늘어났습니다.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분서갱유焚書坑儒라는 사건도 있었어요. 진시황이 벌인 이 사건은 '책을 불태우고(焚書), 유학자들을 산 채로 파묻었다(坑儒)'는 뜻입니다. 과연 이런 일이 정말로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느 정도였는지는 연구자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다만 유가가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는 점은 확실해요.
잘 알려졌듯 진시황은 법가法家의 주장을 따라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는 법法이라는 확실한 틀이야 말로 백성을 다스리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보았어요.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전통과 예의(禮)를 주장했던 유가의 주장과는 영 다른 생각이었습니다. 분서갱유까지는 아니더라도 진시황의 진나라에서는 별로 달가운 대접을 받지 못했을 거예요.
유가가 크게 명성을 떨친 것은 한나라 무제 때에 이르러서였어요. 무제는 '파출백가罷黜百家 독존유술獨尊儒術'을 선언합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공자는 '자子'라는 호칭이 붙은 여러 사상가 가운데 하나였어요. 유가도 여러 학파 가운데 하나였답니다. 이런 다양한 사상가와 그를 따르는 학파를 제자백가諸子百家라 해요. 그런데 무제는 다른 학파를 모두 내쫒고(罷黜百家), 오직 유가의 가르침만을 따르기로(獨尊儒術) 결정합니다. 공자의 위상이 유래 없이 높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사마천의 <사기>에도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답니다. 공자는 <사기세가>에 이름을 올리고 있어요. 그러나 본디 <세가>는 제후들에 대해 기록한 책이랍니다. 무슨무슨 공公이니 무슨무슨 왕王이니 하는 이들이 <세가>의 주인공이지요. 공자는 생전에 공公이라는 높은 지위에 오르지도 못했고, 왕王의 자리에 앉지도 못했답니다. 그런데 사마천 시대에 이르면 공자를 높여 <세가>에 기록합니다.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된 것이지요. 그래서 이후 공자는 무슨무슨 왕으로 불리기도 해요.
공자를 크게 높이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로는 남송시대 주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주희는 그의 이름보다는 '주자朱子'라는 호칭으로 유명해요. 그의 학설 주자학朱子學이라 한답니다. 혹은 성리학性理學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주자학이나 성리학이나 비슷한 말입니다. 워낙 큰 영향을 끼쳤던 까닭에 이에 대해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거예요.
설명을 덧붙여 정리하면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을 유가라 부르고, 유가의 여러 학설 가운데 하나가 주자학, 곧 성리학이라는 학문입니다. 주희의 해석 이외에도 다른 학설이 여럿 있다는 뜻이지요. 여러 학설 가운데 성리학이 가장 유명한 것은 크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조선을 들 수 있어요. 조선의 모든 선비들은 유학자였고, 그들은 대부분 주희의 학설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답니다.
주희는 <논어>에 주석을 달아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어요. 뿐만 아니라 <논어>와 함께 <대학>, <중용>, <맹자>를 함께 묶어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네 권의 책을 함께 묶어 '사서四書'라 하지요. 맞습니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의 그 '사서'가 이 네 권의 책이랍니다. 과거를 준비하는 선비는 누구나 이 사서를 달달 읽어야 했어요.
주희가 이 네 권의 책을 뽑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특정 인물을 따라 공자의 가르침이 전해졌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주희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공자의 가르침이 증삼(증자曾子)을 이어 자사子思와 맹자孟子로 이어졌다는 것이지요. 증삼은 앞에서 간단히 언급했고, 맹자에 대해서는 한 번쯤 들어보았을 거예요. 자사라는 인물이 낯설 텐데 그는 공자의 손자 공급孔伋을 말합니다. 자연스레 공자의 아들은 어떻게 되었나 궁금할 텐데, 불행히도 공자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답니다.
<논어>가 공자의 가르침을 전하는 책이라면, <대학>은 증삼, <중용>은 자사, <맹자>는 맹자의 가르침을 전하는 책이 됩니다. 주희는 이 네 권의 책을 통해 공자의 가르침이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했는지를 배울 수 있다 보았어요. 설명이 여기에 이르면 아마 또 다른 질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다른 제자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자로와 안연이야 공자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치고, 그 밖의 제자들은? 앞에서 소개하지도 않았던 증삼이라는 제자가 공자의 가르침을 이었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된 일인지 의문이 들법합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저는 주희의 주장에 의문을 가지고 있답니다. 주희가 말하는 것처럼 증삼이 그렇게 중요한 제자였는지 잘 모르겠어요. 물론 <논어>에서 증삼이 좀 특별하게 그려지는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증삼아 나의 가르침을 하나로 꿰뚫는 것이 있단다."
"네, 그렇습니다."
선생께서 나가시자 다른 제자들이 물었다.
"무슨 뜻인가요?"
"선생님의 가르침은 충忠과 서恕일뿐입니다."
4-15
충忠과 서恕에 대해서는 길게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여기서 보이는 특별한 분위기를 읽을 필요가 있어요. 공자가 증삼에게 뭔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요. 증삼이 친절하게 풀이해준 이후에야 그 의미를 조금 알 뿐입니다. 이를 보건대 증삼은 뭔가 특별한 제자가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다음과 같은 부분도 있답니다.
"자공아 너는 내가 많이 배워서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아닌가요?"
"아니다. 하나로 꿰뚫는 것이 있단다."
15-3
'하나로 꿰뚫는 것(一以貫之)', 이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증삼에게만 이야기해준 것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한편 이런 부분도 있어요.
자공이 물었다.
"평생토록 지킬 가르침을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을까요?"
"서恕가 있지!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아라!"
15-24
증삼에게 이야기했던 서恕를 자공에게도 이야기해주고 있네요. 여기서는 그 내용이 조금 더 상세합니다. 이렇게 다른 부분을 살펴보면 증삼이 뭔가 특별한 제자였을까 의문이 들 수 있어요. 일부 연구자는 증삼을 따르는 사람들이 자공에게 들려준 공자의 말을 편집하여 공자와 증삼의 은밀한 대화를 만들었을 거라고 보기도 한답니다.
훗날 주희의 해석은 하나의 정설定說, 변하지 않는 확실한 진리처럼 여겨져요. 그러나 <논어>를 꼼꼼히 읽으면 그 역시 하나의 해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답니다. 그래서 주희 같은 사람이 공자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어요.
같은 책에 대한 해석도 시대마다,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입니다. 과연 주희의 해석은 공자의 가르침을 변화, 발전시킨 것일까요? 아니면 제멋대로 풀이한 것일까요? 일단은 질문으로만 남겨둡시다. 답을 찾으려면 한참이나 많은 논의가 필요할 테니까요. 더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어떻게 <논어>를 읽을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다음, 마지막 시간에는 이에 대해 짧게 이야기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