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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an 19. 2019

유교 페미니즘? - 전통이라는 우물 혹은 썩은 물

"바드란은 페미니즘을 자기 토양에서만 자라는 식물이라고 했다. 따라서 한국 토양의 기독교 전통에서 페미니즘이 자라게 하려면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유교 전통을 고려해야 한다. 다음번 글에서 유교 페미니즘을 살펴보고자 하는 이유이다."
<한국 기독교 페미니스트가 이슬람 페미니즘 주목해야 하는 이유>


난 '유교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불편하다. 이는 페미니즘보다는 앞에 있는 '유교'라는 말 때문이다. 글쓴이는 종교 가운데 하나라는 말로, '유교'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여기에는 세계 종교 가운데 하나로 포괄하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기도 하다. 기독교, 이슬람교, 유교 등등. 그러나 중국 전통의 종교 가운데 하나로 유교가 언급되는 것, 대표적으로 삼교三教 가운데 하나로 언급될 때의 유교와는 전혀 다른 맥락을 갖는다. 후자가 도교와 불교라는 내부 혹은 이질적인 대상을 수용, 종합하는 그릇으로의 유교를 의미한다면, 앞의 것은 이른바 시민권을 소유한다는 표징처럼 사용된다. 세계 종교란 어디에나 있어야 하는 법이니 우리에게는 유교가 있다는 식으로.


개인적으로는 유교라는 표현보다는 학파의 집단적 성격이 강한 유가儒家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유교라는 말이 '유가의 가르침'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유교'라는 말에는 그 가르침의 내용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남는다. 대관절 유교란 무엇인가? 그것이 경전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지식 체계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가례와 상례와 같은 의식을 통해 면면이 이어져온 의례를 가리키는 것인가. 혹은 사회의 태도와 규범, 윤리를 규정하는 도덕의식을 가리키는 것인가. 내가 보기에 글쓴이는 세 번째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의식적으로 유가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는 첫 번째 의미에 주목하겠다는 뜻이고.


그렇기에 나는 글쓴이의 글을 읽으며 그가 이야기하는 '유교 전통'이라는 말의 모호함을 떨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전통, 즉 과거의 도덕관념과 글쓴이가 이야기하는 유교라는 말이 당최 무엇이 다른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각 사회, 특히 비서구권 사회에서는 각 문화의 독특한 토양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전통'일 테다. 이때의 전통이란 하나의 독특한 문화적 바탕을 이야기하는 것일 텐데, 그 독특성이, 그것을 한국으로 삼던, 동아시아로 삼던 그 범위가 무엇이던 어째서 유교가 되어야 하는지는 이야기하지 못한다. 이는 다만 유교가 오래도록 도덕 의식을 이루는 바탕으로 여겨졌다는 하나의 '환상'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한국 토양'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어째서 '유교 페미니즘'이냐는 것이다. '도교 페미니즘'이나 '불교 페미니즘', '무교巫教 페미니즘' 따위도 있을 텐데.


'전통 = 유교'를 환상이라 말했다. 이는 유가가 끼친 광범위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이를 확대 해석한다는 판단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 15세기경 이후 한반도는 역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독존유술獨尊儒術, 즉 유가가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는 사회였다. 조선의 통치 규범이 유가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문제는 그것이 과연 '전통'이라 일컫는 것, 특히 근대화를 겪으면서 솎아내어진 것들을 대표하는 말로 적합한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전통이란 그저 줄줄이 흘러나오는 유구한 흐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가치에 따른 선별의 결과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례로 같은 질문을 중국에 던져보자. 과연 '중국의 전통'을 유교라 할 수 있을까? 한편 일본은? 


쉬이 답을 찾기 힘든 것은 근대에 대한 각각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20세기 중국 지식인과 견주어 보건대 우리는 전통의 선별과정에서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을 버릴까 하는 질문을 주체적으로 던져본 일이 별로 없다. 근대가 달성해야 하는 목표가 되어 버렸을 때 전통이란 상당수 '선별하여 버려야 할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버려야 할 것이 분명해야 계승해야 할 것이 그나마 또렷해지는 법. 과연 우리에게 유교란 버려할 것인가 계승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철저한 고찰 없이 전통은 어느 순간 겸허히 계승해야만 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유가 경전 번역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는 곳의 이름이 '전통문화연구회', 혹은 '민족문화추진회'라는 점을 생각해보라. 우리에게 근대화란 유린의 역사였으며 그렇기에 전통이란 버릴 것보다는 서둘러 챙기고 살뜰히 보살펴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전통이라는 권위를 입고 면면히 계승되어야 하는 것들의 총합, 경서에 대한 똑같은 자구 해석, 예의범절 및 국민의례준칙과도 같은 형식적 태도, 나아가 우리 토대가 되는 정신의 바탕 등등을 모두 싸그리 합쳐 유교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글쓴이가 유교 페미니즘이 자기 종교, 즉 유교를 가부장제로부터 구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과연 어떤 작업인지가 모호하게 된다. 글쓴이는 남녀유별이라는 규범 대신 인仁이라는 보편 규범이 그 대안으로써 가능하리라 설명한다. 나아가 그것이 서구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돌봄의 윤리와 상통할 수 있다는 설명까지. 과연 '인'이 그 기능을 할 수 있을까? 일면 '인'의 보편적 가치에 주목하는 관점에서는 불가능한 설명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글쓴이가 말하듯 유교가, 나아가 '인'이 상호 관계의 윤리라고 한다면 그때 '인'을 지탱하는 관계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다시 던져져야 한다.


'인'을 인간의 본성, 혹은 천리天理라는 우주적 규범과 연결시키지 않고 인간사회의 보편 윤리로 해석하려는 유가 지식인은 여럿 있었다. 흔히 이를 '두 사람의 윤리(二+人)'라고 파자破字하여 해석하곤 한다. 문제는 이 두 사람이 흔히 말하는 강상 윤리를 지탱하는 전통적인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군신, 부부, 장유와 같은 관계가 여전히 상존하는 한, 관계의 윤리라는 말은 헛바퀴만 돌뿐이다. 여성에게 지아비를 섬기는 아녀자로서, 자식을 키우는 어미로서만 '관계의 윤리'를 요구한다면 그 ‘인’이란 대체 무엇일까? 과연 그것이 페미니즘이 말하는 돌봄의 윤리로 치환 가능한 것일까? 흔히 말하는 서구의 파편적 개인을 구원할 수 있는 관계의 윤리가 과연 유가에 있을 수 있는 걸까?


글쓴이는 '한국의 기독교가 유교 문화의 젠더 관계를 흡수하며 형성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유교 페미니즘에 대한 일차적 관심은 여기서 출발한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으로서, 종교인으로서의 페미니즘을 탐구하는 관심이 '유교 페미니즘'이라는 이야기로 수렴된다. 허나 내가 던지는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과연 한국 기독교가 '유교 문화의 젠더 관계 흡수하며 형성'되었다는 문제가 예리한 접근인가? '유교 문화'라는 것이 허상이라면 이것 역시 허울뿐인 공격이 될 것이다. 또한 설사 유의미한 문화로부터 유의미한 영향을 받았다면 그것이 왜 토양이 되어야 하는 걸까? 


나는 공자가 주희가, 혹은 <논어>건 <맹자>건 하는 것들이 여전히 가능성을 지니는 무엇이라 생각한다. 그렇다 하여 그것이 만병 통치약은 아닐 것이다. 페미니스트 공자나, 페미니스트 주희는 여전히 낯설다. 도리어 선행되어야 할 것은 전통이라는 토대에서 태어날 00 페미니즘이라는 기묘한 조합보다, 페미니즘이라는 낯설고도 규정하기 힘든 무엇으로부터 전통이나 경서를 읽어내는 작업이어야 한다. 


전통이라는 것이 꼭 우물 물이라는 보장은 없다. 썩은 물일 수도 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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