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백가諸子百家라는 말이 있어요. 고대 중국에 등장한 여러 사상가와 학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공자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예요. 공자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들을 일러 유가儒家라 합니다. 그 이외에도 노자와 장자의 도가道家, 상앙과 한비자의 법가法家, 묵자의 묵가墨家, 공손룡의 명가名家 등이 있어요. 이 가운데 훗날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공자의 유가였습니다.
사실 공자 시대에 유가는 크게 이름을 떨치지 못했어요. 당시 사람들의 관심과는 영 거리가 먼 주장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부국강병富國強兵, 부유하고 강한 나라를 만드는 데 관심을 두었어요. 그러나 공자의 관심은 그와 정반대였지요.
위령공이 군사를 다루는 일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제사를 치르는 일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군사를 다루는 일에 대해서는 배운 적이 없습니다."
다음날 위나라를 떠났다.
15-1
위령공 입장에서는 당연한 질문을 한 것이었어요. 여러 나라가 세력을 다투고 있던 상황에서 군대에 대한 일만큼 절실한 질문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공자는 그런 일에 대해서는 배운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튿날 위나라를 떠나버려요. 크게 실망했던 까닭입니다. 위나라를 떠난 공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안타깝게도 위령공같이 관심을 갖고 질문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어요. 제사를 치르는 일은 관심 밖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공자의 유가가 훗날 그렇게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된 것일까요? 선비(士)는 본디 공부한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선비라고 하면 우리는 자연스레 유학자를 떠올리기 마련이지요. 과거시험을 치르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논어를 달달 외워야 했답니다.
이렇게 된 데는 제자들의 역할이 컸어요.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제자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전했답니다. 그것도 공자에게서 배운 방법으로. 그래서 어떤 학자는 공자야말로 최초의 직업 교사라 평가하기도 해요. 그의 말을 따르면 공자는 최초의 학교를 세운 인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공자가 세운 학교의 제자들이 각자 학교를 세우고, 또 그 학교의 제자가 다른 학교를 세우고...
성균관 대학교의 로고에 은행잎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한편 1398이라는 숫자가 함께 새겨있습니다. 바로 조선의 성균관을 그 뿌리로 삼아 1398년에 학교가 시작했다고 여기기 때문이예요. 은행잎은 공자가 제자를 가르쳤다는 행단杏壇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공자는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해요.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에는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성균관대학에도 공자를 모신 대성전大成殿이 있고, 거기에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답니다. 공자의 후예가 세운 여러 학교 가운데 하나인 셈이지요.
공자의 학교는 조선의 수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지방 곳곳에 있는 서원도 똑같은 기능을 했답니다. 그것뿐인가요. 향교는 지역에 세워진 공자의 학교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도 도시마다 '교동校洞'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디 향교가 있었던 곳이랍니다. 공자로부터 출발한 학교의 전통은 지금도 이렇게 이어지고 있어요.
그렇다고 공자의 학교마다 모두 똑같은 내용을 달달 왼 것은 아니었습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제자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생겨났어요. 예를 들어 유약과 증삼이 있습니다. 이 둘은 논어에서 이름 대신 각각 유자有子, 증자曾子라고 불립니다. '자子'는 위대한 스승에게 붙이는 호칭이라는 말을 기억하는지요? 이것을 보면 논어의 상당 부분은 유약과 증삼의 제자가 엮은 것이 아닐지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 공자의 학교를 이끌 인물을 뽑았다고 해요. 공자와 똑 닮은 유약이 그 자리를 대신할 인물로 뽑혔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이유라고 하겠지요. 겉모습이 닮았다고 스승의 자리를 대신할 인물로 뽑다니. 그러나 고대 사회에는 겉모습이 많은 것을 다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우리와 같은 의문을 품었기 때문일까요? 증삼은 이를 반대했다고 전해집니다.
유약과 증삼이 각각 어떻게 다투었는지 논어는 별 내용을 전하지 않고 있어요. 다만 위와 같은 기록을 참고하면 유약을 섬기는 제자와 증삼을 섬기는 제자가 각기 다른 입장에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 권의 책에 다른 주장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보다 분명한 차이는 자하와 자장에게서 발견할 수 있어요. 논어의 기록을 봅시다.
자하의 제자들이 자장에게 사귐에 대해 물었다.
자장이 말했다. "자하는 무어라 말하더냐?"
"자하께서는 사귈만한 자와 사귀고 사귈만하지 않은 자는 내치라 하셨습니다."
"선생님께 들은 것과는 다르구나.
군자는 빼어난 인물을 높이고 여러 사람을 품어야 하는 법이다.
훌륭한 이를 칭찬하고 못난 이는 도와줘야지.
내가 크게 빼어난 인물이라면 어떤 사람인들 품어주지 못하랴?
내가 못난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나를 내치겠지.
내가 다른 사람을 내칠 것은 무어란 말이냐?"
19-3
자하는 좀 조심스러운 관계를 생각했다면 자장은 그렇지 않았어요. 자신의 성품이 먼저 중요하지 다른 사람을 신경 쓸 틈이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자하의 제자가 자장의 이야기를 전해주었을 텐데 자하의 입장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자장만 자하를 은근히 비판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자유도 자하를 비판했어요.
자유가 말했다.
"자하의 제자는 별 볼 일 없구나.
청소하고 인사하고 예의를 갖추는 일은 잘하지.
그런데 그것은 작은 일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배우고 있지 못하니 어찌하랴."
자하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아! 자유의 말이 지나치구나.
군자의 가르침에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할까?
풀과 나무도 성질에 따라 나누는데, 군자의 가르침을 어찌 멋대로 할 수 있을까?
배움에 순서가 없는 분은 오직 공자와 같은 성인뿐이다"
19-12
자하의 제자들은 청소하고 인사하는 일을 우선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유는 그런 것이 모두 작은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공부는 하지 않고 쓸데없는 일에 힘을 들인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러나 자하의 생각은 다릅니다. 풀과 나무가 각각 성질에 따라 나뉘듯, 사람도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먼저 행동거지를 갖춘 다음에 학문을 배우는 것이 제자들에게 맞는 공부라고 생각했습니다.
논어는 누구의 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저 여러 의견이 있었다는 점을 소개할 뿐이예요. 만약 공자가 살아있었다면 다들 몰려가서 누구의 말이 맞는지 헤아려달라고 간청하지 않았을지요. 논어는 도리어 이들의 질문을 우리에게 되묻고 있습니다. 논어를 읽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당연히 후대의 학자들마다 이를 달리 해석했어요. 어떻게 보면 작은 일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매우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배움에 대해, 인간에 대해 각기 다른 생각을 갖고 있기에 논쟁이 벌어지는 일이니까요. 이렇게 다양한 논쟁과 함께 곳곳에 공자의 학교가 세워졌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더 먼 훗날 벌어진 논쟁을 다룰 예정이예요. 수백 년, 천년 뒤 공자의 학교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논어> 밖의 인물들을 만날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