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픈옹달 Jan 21. 2019

은혜! 공동체? - 만 1년의 강의를 마무리하며

정명正名이라는 오래된 전통을 생각하면 이름을 정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어쨌든 이름값에 대한 행동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름에 어떤 선입견을 갖거나 하는 것이 문제 기는 하나 그런 태도를 마냥 비판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설사 허명虛名이라 하여도 이름은 늘 특정한 역할을 하기 때문.


학교를 다니면서 정말 수 없이 많은 은혜와 지혜를 만났다. 지금은 하도 옛 일이라 대관절 누가 무슨 은혜고 누가 무슨 지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김이박최 등등 가능한 은혜와 지혜는 다 만났던 듯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은혜'라는 이로부터 은혜를 만나지도 못했고, '모지혜'라는 인물로부터 지혜를 얻지도 못했다.

 

은혜니 지혜니 하는 말을 꺼낸 것은 '은혜 공동체'와의 인연 때문이다. 오늘로 장장 만 1년이 넘는 긴 강의를 끝냈다. 한 달에 한 번씩 강의한 것이지만 결코 널널하지는 않았다. 총 12강. 만 1년이 되어야 하나 중간에 일이 있어 만 1년이 넘었다. 나름 대장정이었던 셈. 


이곳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17년으로 일단 거슬러 올라가야겠다. 도봉구 평생학습관에서 강의 요청을 받았다. 그것도 나름 인연이 뿌린 결과인데, 예전에 청소년 강좌로 관심을 두었던 분이 연락을 주어 강의를 열게 되었다. 한 학기는 <논어>를, 한 학기는 <장자>를 읽기로 했다. 


경제적인 도움 이외에도 다른 성과가 적지 않았는데, 하나는 좀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점이다. 지식 보부상으로 살다 보면 거상巨商, 남산 강학원 멤버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른바 이 바닥에서 명성이 자자하기 때문이다. 한때 함께 공부했고 같은 말을 섞었던 사람으로 나 역시 그들과 멀다고 할 수는 없는데, 다행히도 좀 다르다는 평을 들었다. 어쨌든 뻔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 내 스스로 읽어낸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준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이야기였다. 


한편 그 강의를 똑같이 공동체에서 했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받았다. 도봉구 강의에 줄곧 참석하시던 분이 부탁한 것이었는데, 나름 꽤 반가운 제안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아 강의 요청이 오면 반가운 마음부터 든다. 


돌아보면 강의를 요청받았을 때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어디 지방 소도시라도 내려가서 학원이라도 차려 생계를 꾸려야 하나 생각하던 참이었다. 설사 그렇게 삶의 근거지를 바꾸더라도 한 달 한번 강의니 괜찮겠다는 계산이 앞섰다. 


따져보면 지금이나 그때나 별 차이가 없고, 어떻게 보면 지금 절벽에 한 걸음 다가간 셈이지만 절박함이란 객관적인 상황과는 영 다른 것이기도 하다. 어떤 절박함이 함께 들러붙었다고만 할 수밖에. 


절박함 때문이었을까? 욕심도 많았다. 나름 소화한 <장자> 내용을 글로 정리해야지. 가능하면 책으로 엮어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더랬다. 나중에는 그런 욕심을 유지할 집요함도 체력도 사라졌지만.


어쨌든 꾸역꾸역 만 1년을 넘게 <장자>를 읽어왔다. 곱씹어 보면 꽤 즐거운 시간이었다. 나 같은 부스러기 독립연구자에게는 내 생각을 들어줄 사람이 여럿 있다는 것은 적잖은 행운이다. 매 시간 수십 명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큰 선물이리라. 한편 또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했다는 것도 좋은 일이다.


은혜 공동체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기도 하고, 커다란 집이기도 하다. 다른 모든 공동체가 그렇듯 개별 공동체의 구체적인 삶은, '공동체'라는 말에 들러붙는 다양한 선입견과는 좀 다른 낯선 모습을 품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처음 그곳을 찾았을 때는 공동체라기보다는 하나의 낯선 국가에 발을 디딘 느낌이었다.


사실 나는 공동체라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십 년도 넘게 교회 공동체와 연구자 공동체, 생활 공동체를 경험하며 닳고 닳은 까닭이다. 공동체라면 즐겁고 행복한 기억보다는 뭔가 깊숙이 처박아둔 부정적인 감각들이 떠오르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의심 많은 인간이 의구심을 떨칠 수는 없는 일이다. 행복하기만 공동체는 없으며, 영원하기만 한 공동체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결점을 찾자고 돋보기를 꺼낼 필요도 없고, 언제 망하나 지켜보자며 날짜를 세고 있을 필요도 없다. 각각의 덕이 있고 각각의 장점이 있을 뿐이다.


주변의 몇몇 사람을 모아 그곳을 가보자고 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 공동체의 삶을 재현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나름 잘 굴러가는 곳이니 뭔가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러나 동료들의 반응은 영 시큰둥하다. '은혜'라니! 상종할 수 없는 거북한 느낌이 든다는 반응. 한편 내가 방문하는 시간도 중요한 이유였을 테다. 빨간 날, 주일은 내가 주인이 되어 쉬는 날인데 그날 어디를 가자니 반갑겠는가.


강의를 마치면서, 비슷한 말이 나왔는데, 은혜 공동체는 은혜 따위는 없는 곳이다. 그들 스스로도 별로 달가워하는 이름이 아닌 것 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형태로든 남아있는 교회의 모습, 기독교의 냄새는 선명하다. 오늘 함께 데리고 간 청소년들은 소개도 듣기 전에 알아채더라. 교회에 온 것 같다고.

 

지난 1년간의 강의는, 나에게 교회든 기독교든 하는 것에 대해 다시 곱씹어 생각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내가 한 때는 내 혈액형이 C형(christ)이라 생각했다고 말하면 벙찐 얼굴로 쳐다보곤 한다. 나에게 도무지 예수쟁이의 냄새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여전히 기독교 언저리에서 살아가고 있고, 어느 정도는 그것을 살뜰히 아끼기고 있기도 하다.


공동체로 초대해준 분은 은혜 공동체는 교회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으나, 거꾸로 나는 꼼짝없이 한 달에 한 번은 교회를 가게 되었구나라고 생각했다. 굳이 해석을 하자면 그런 것이야 말로 흔히 이야기하는 '은혜'라 이야기할만한 것이겠지. 


흥미롭게도 오늘은 가족에 나름 큰(?) 행사가 있는 날이기도 했다. 작은 외삼촌의 목사 임직식이 있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아침 일찍 교회 일을 처리하고 서울로 올라오셨다. 공교롭게도(!) 시간이 겹쳐 그곳에 가지도, 서울로 올라온 가족 얼굴을 보지도 못했다. 굳이 해석하자면 이런 것이야 말로 흔히 이야기하는 '은혜'라 이야기할만한 것이겠지.


긴 강의를 마치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생각이 많았다. 만 1년 넘게 강의하면서 적잖이 위로받은 것이 사실이다. 여전히 독립연구자로서의 생계는 요원하나, 내 목소리를, 내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내가 강단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텍스트를 얼마나 아끼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다 강단과 텍스트를 사랑한 어리석은 연구자로 굶어 죽을지 모르겠지만.


한편으로는 공동체 건 기독교 건 하는 것 변두리에 내 자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것이 운명인지, 아니면 삶의 낡은 양식 때문인지는 모르나 여튼 여전히 공동체와 기독교는 나에게 긍정적으로 건 부정적으로 건 유의미한 말이다.


은혜 공동체에서는 주일, 강의를 듣기 전에 함께 노래를 부른다. 한 동안은 'you raise me up‘을 불렀다. 처음에는 공간을 꽉 채우는 화음을 들으며 '난 누구, 난 지금 어디'라는 질문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오늘 마지막 강의 전에는 두 곡을 불렀는데, 나도 함께 노래를 불렀다. 오래도록 내 세포 속에 있던 어떤 감각이 새롭게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2019. 01. 21 새벽.

Lowenbrau & Grolsch와 함께.

작가의 이전글 변신인가 배반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