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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불꽃?

<레드로자 세미나>

by 기픈옹달

솔직하자. 세미나를 열면서 '혁명의 불꽃'이라는 말을 붙였는데 사실 아무런 생각 없이 한 짓이다. 따져보니 별로 적합한 말도 아니다. 우선 로자 룩셈부르크 본인에게. <레드 로자>로 만나는 그의 일생을 보면 그는 분명 혁명의 이상을 품은 인물이었다. 그의 유명한 질문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에서 볼 수 있듯 그는 개혁, 기회, 수정보다는 '혁명'을 꿈꾼 인물이었다. 그의 최후가 실패한 혁명의 기도,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 때문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한편 그의 출생을 보자. 그는 또 다른 실패한 혁명, 파리 코뮌이 일어난 해에 태어났다. 파리 코뮌과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 그 사이에 놓인 로자의 일생.


정확히 100년 전, 1919년 1월 15일 그는 세상을 떠났다. 2019년, 1세기 뒤에서 그의 생애를 조망하건대 그를 교차하는 다양한 사건들은 좀처럼 '혁명'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그는 혁명을 꿈꾼 인물이었으나 흔히 이야기하는 혁명이란 그의 삶을 빗겨나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레드 로자>에서 조망한 그의 삶을 보건대, 혁명보다는 다른 데 눈이 간다. 특히 그가 비판한 것들. 국가, 민족, 독재, 야만 등등. 누군가는 그에게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적 면모보다는 아나키스트 적 면모가 더 돋보인다 하던데 나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말이다.


허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21세기 오늘날 혁명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20세기를 돌아보건대, 그 시대를 점령한 것은 들끓는 정념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전쟁, 건국, 이상, 광기 … 혁명은 결코 이것들과 떼어놓고 이야기되지 않는다. 10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20세기의 정념은 어디 있는가? 20세기의 이론가들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 혁명이 도래하리라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나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지금, 만약 자본주의가 멸망한다면 혁명이라는 거대한 힘에 의해 전복되기보다는 스스로 말라죽어버리는 건 아닐까? 로자가 진단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연속적 축적이 외부를 착취하는 데서 가능하다면, 20세기의 자본주의가 제국주의의 얼굴을 했다면, 오늘날 자본주의는 바깥은 물론 내부를 갉아먹고 있는 건 아닐까. 20세기의 그 정념마저도 자본주의의 탐욕스러운 이빨에 먹혀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연장선에 있는 혁명 조차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만나보고 싶었던 것은 좀 다른 참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참조를 '사유의 지렛대'라고 하자. 어떤 사회학자는 현대 사회를, 모든 것이 유동한다고 이야기했는데, 마치 액체처럼, 내가 보기엔 그 액체 같은 성질에 하나가 더 붙어 버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바로 미끄덩거림. 모든 것이 미끄러지며, 흘러내리는 것 같다. 어느 것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그렇다고 적절한 마찰을 통해 어떤 불꽃을 만들어 내지도 못하고. 미끌거리는 시대를 벗어나려면 좀 뭔가 붙잡을 것이 필요하지 않겠나. 특히 이전과는 좀 다른.


그렇다고 그를 주목한 것이 특정한 이론에 있지는 않다. 확고한 이론가로서, 정교하고도 든든한 체계를 선물해줄 그런 인물로 그를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이론이란 그것을 공부하는 재미도 있고, 그 자체가 권력을 생산하기도 하지만 이런 미끄덩거리는 시대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소재이다. 아무리 견고한 체계를 세운다 한들 그것이 얼마나 오래가겠는가. 이론은 근거 없이, 체제는 전제 없이 성립되지 않는다. 역사는 늘 전거를 찾는데, 그를 역사로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내일 당장 혁명이 있다고 한들 스파르타쿠스단의, 혹은 다른 무엇의 시도가 다시 반복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의 존재를 규정하는 몇 가지 독특한 사실들이었다. 폴란드 출신, 여성, 유태인, 절름발이, 왜소한 체격 등등. 그를 설명하는 적절한 말이 있다면 '소수자'라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그는 존재 자체가 중심과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곁다리 인생. 아마도 이 부분이 그가 동시대의 여러 인물과 차이점을 만들어 내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을지.


<레드로자>는 그의 이런 면에서 출발하여 매우 개별적이면서도 내면적인 부분까지 파고든다. 로자 룩셈부르크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을 듣고 혁명과 이론을 먼저 떠올렸을 텐데, 흥미롭게도 <레드 로자>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장소는 거리도, 광장도, 감옥도 아니라 침실, 그것도 단 둘이 있는 침대 위이다. 이는 그 역시 하나의 인간이었다는 평범한 사실을 환기시킨다. 더불어 그가 주변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는 그가 얼마나 섬세한 감각의 소유자였는지도 보여준다.


누구에게는 낭만적인 요소에 불과하겠지만, 어쩌면 21세기의 혁명과 이론이야 말로 저 어딘가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이는 단순히 이성과 감정 사이의 줄타기를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회와 개인, 광장과 밀실, 주장과 정감, 투쟁과 사랑 사이의 그 무엇.


도식적인 독해를 접어두자. 혁명이냐 개혁이냐? 혁명이다! 인터내셔널이냐 민족주의냐? 민족주의다! 자유냐 통제냐? 자유다! 이 모든 답은 쉽고 어느 정도 답이 정해져 있다. 그러나 거꾸로 중요한 것은 그 양상일 것이다. 개량이건, 개혁이건, 수정이건, 어쩌면 오늘날 필요한 것은 여우의 간계일 수도 있다. 비록 레닌은 그를 하늘 높이, 무엇보다 높이 나는 독수리에 비유했지만. 마찬가지로 민족이나 국가가 절대 악일 수도 없으며, 자유와 민주가 절대 선일 수도 없다. 무엇인가 좀 다른 독해의 기준이 필요하다.


따라서 그의 생애를 좇아보며 궁금해지는 것은 20세기 초반 유럽의 상황이다. 파리코뮌과 같은 실패한 혁명의 흔적 위에서, 혁명가들은 어떤 이상을 꿈꾸었는가. 그리고 그 이상의 또 다른 얼굴이, 혹은 정반대의 적대자들이 기도한 전쟁은 무엇이었는가. 더불어 로자가 살지는 못했지만 그 이후에 불어닥친 또 다른 변곡점과 사건들. 아마도 이를 위해서는 또 다른 공부가 필요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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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로자> 세미나 발제문

2019.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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