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작가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며칠 전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들었던 생각이었어요. 어째서 저 문장을 계속 되뇌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강의를 시작하면서 오늘날 청소년의 고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일 거예요.
얼마 전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요즘 청소년의 고민은 "직업 - 공부 - 외모" 순이었다고 해요. 그러나 속을 뜯어보면 공부와 직업은 별로 차이가 없답니다. 수치로도 비슷한 데다 사실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직업과 공부, 밥벌이와 성적.
어느 유명 강사는 공무원을 꿈꾼다는 청년의 말을 듣고는 뺨을 때리고 싶다고 말해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보잘것없고 뻔한 꿈을 꾸어 무엇하느냐는 거죠. 몇 년 전이라면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거예요. 그래서 성적이니 밥벌이니 하는 것을 고민하지 말라. 진정한 공부는 따로 있다 어쩌구저쩌구 떠들었겠지요.
그러나 요즘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못하겠어요. 그것은 제 스스로 그렇게 떳떳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운명을 개척하는 공부를 하는 사람도 아니고, 삶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공부를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조금은 억척스럽게, 조금은 멋대로 그럭저럭 공부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지요.
지난겨울 한 친구가 몇 년 만에 전화를 했습니다. 내용인 즉, 공무원이 되었다는 소식이었어요. 고등학교 졸업 전에 공무원이 되었다며 좀 들뜬 목소리였습니다. 저도 잘 되었다고 축하해주었어요. 진심으로. 몇 년 만에 연락을 준 것도 고마웠지만, 그렇게 이 사회에서 제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이 좋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중학교 시절 책을 읽고, 이야기하고, 글을 쓰고 했던 시간이 그 친구에게 어떤 도움이 되었을까요? 공무원이 되기까지 대체 무슨 도움을 주었을까요? 뚜렷하게 설명할 말을 찾지는 못하겠습니다. 사실 이 질문을 다른 데로 돌려 보아도 마찬가지예요. 성적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나아가 밥벌이에 무슨 도움이 될지.
글쓰기는 꽤 힘든 일입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예요. 그렇다고 돌아오는 보상이 크지도 않습니다. 글을 써서 어디에 보이려고 하면 늘 부끄러움이 먼저 돌아오지요. 자신의 글을 보고 스스로 실망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답답하기도 하지요.
직업과 공부가, 밥벌이와 성적이 고민인 친구들에게 어떻게 글쓰기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과제로 편한 밤을 이루지 못하는 친구들에게, 수행평가와 중간고사, 기말고사, 자소서 등등으로 급급한 친구들과 어떻게 글쓰기를 할 수 있을까?
'모두가 작가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말은 우선은 솔직해야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글쓰기는 성적을 올려주는 것도 아니고, 밥벌이가 되는 것도 아니라고. 누구는 글쓰기가 궁극적으로 성적에 도움이 되고, 이 사회의 스펙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할 거예요. 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중간에 많은 것이 빠져 있어요. 그리고 그것은 오직 소수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일까요? 글쓰기는 무슨 선물을 줄 수 있을까요? 손에 동전을 쥐어줄 수 없다면, 무엇을 쥐어줄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손에 쥐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의 이름이 박힌 책, 자기의 숨결이 담긴 책은 쥐어줄 수 있겠지요. 자기의 글이 담긴, 나만의 고민과 생각, 추억, 경험, 성장 등등이 담긴 작은 책을 하나 선물해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예요. 따라서 아무나 작가는 되는 건 아니지만, 누구나 '저자'가 될 수는 있을 거예요. 밥벌이가 되지는 않아도, 또 다른 인연을 만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적어도 나를 만나는 창구는 될 수 있겠지요.
그러니 더 많은 책을 만들어야겠다. 삶의 가능성을 위한 지렛대로. 또 다른 삶을 위한 디딤돌로. 여러 저자들을 만들어야지. 천 가지 책과 만 명의 저자들을 만나야지. 이는 한편 또 제 자신에게 스스로 던지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지식이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이 요즘 제 생각입니다. 이론이 사회를 바꾸지 못한다는 것이 요즘 생각입니다. 마찬가지로 금강석과 같은 단단하고 빛나는 문장이 있다고 한들, 그것이 어찌 일상에 힘을 불어넣어 줄 수 있을까요.
도리어 '쓰기'야말로 다른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지식보다는 실천이, 이론보다는 현실이, 글보다는 쓰기가. 그리고 책을 엮는 모험. 또 다른 하나의 실험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지난 10여 년 간 이래저래 엮은, 관계를 맺은 책들을 보니 수많은 얼굴이 눈에 스칩니다. 다들 잘 살고 있겠지요. 지금은 서로 제 삶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숙제를 풀고 있지만 또 언젠가 인연이 닿으면 만나겠지요. 그들의 책장에 꽂혀 있는 작은 책과 제 책장에 보관한 이 책이 그때 또 인연의 실타래가 되기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