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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May 23. 2017

<제물론>, 너도 나도 하나의 피리에 불과하다

교훈을 금함


지식이란 말과 글을 다루는 능력입니다. 같은 말도 얼마나 다르게 쓰일지 아는 것, 말에 감추어진 또 다른 의미를 읽어내는 힘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좀 예민해야 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작은 표현, 단어 하나에 많은 공을 들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새로운 말을 만들기도 하고, 반대로 기존에 있던 말을 버리기도 합니다. 


앞서 ‘착하다’는 말이 우리가 흔히 아는 것과는 다르게 쓰인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착한 가격’ 혹은 ‘착한 몸매’ 따위의 말에서 볼 수 있듯, 착하다는 말에는 ‘다루기 쉽다’, ‘보기 좋다’ 등의 의미가 실려 있습니다. 따라서 착하다는 말에는 ‘정의正義’가 빠져있습니다. ‘착한 사람이 되어라’는 말에는 ‘옳은 일을 실행하라’는 의미보다는 ‘보기 좋은 일을 하라’는 뜻이 담겨 있지요. 


‘착하지 말라’는 말에 누군가는 그럼 ‘나쁜 사람이 되어라’는 말이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누군가 ‘악惡’으로 규정한, 한 시대의 가치가 제한한 지점을 때로는 넘어서야 할 때도 있습니다. ‘악인惡人’이 되어서 말이지요.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훗날 혁명가라 불리는 이들이 처음에는 악인으로 불렸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강하게 요구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착하지 말라’는 말이 ‘악을 행하라’라는 말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오늘 우리 사회의 가치를 성큼 뛰어넘으라고 가볍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선의 반대가 꼭 악은 아니듯, 착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꼭 그 반대만 있는 건 아닙니다. 고귀한 사람, 성실한 사람, 진솔한 사람, 소박한 사람 … 착한 사람이 아니어도, ‘착하다’는 말을 버려도 우리가 좇아야 할 가치는 여전히 많습니다.


과제를 받아보고 ‘교훈’이라는 말을 버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말 역시 별로 좋은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상식적이고 뻔한 가르침’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가요. ‘교훈을 주는 책’, ‘교훈적인 이야기’라면 따분하게 여겨지지 않나요? 기대되는 게 별로 없지 않나요? 누군가 ‘교훈을 주는 책’이라며 책 한 권을 권해준다면 그 내용을 궁금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착한 아이’라면 의무감으로 읽겠지요.


‘교훈을 주는 글’은 채 읽기도 전에 이미 읽은 것이나 다름없는 글입니다. 읽을 필요가 없는 글이지요. 그래서 읽은 뒤의 반응도 정해져 있습니다. 늘 ‘~야겠다.’는 반성이나 다짐이 뒤따라 옵니다. 그러나 이 말이 실제로 힘을 갖지는 못합니다. 이루지 못할 약속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교훈이라는 말을 버립시다. 아니, 이제부터는 금하려 합니다.


도리어 어떤 깨우침, 깨달음, 새로운 발견을 이야기하기 바랍니다.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낯선 문제를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공부가 재미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낯선 것, 신기한 것을 다루는 것이야 말로 짜릿한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지요. 그러고 보면 ‘교훈’을 재미있다고, 흥미롭다고 여기는 사람을 본 적이 없지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배움을 통해 우리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익숙함을 경계해야 합니다. 따라서 익숙한 말을 조심하세요. 하나씩 점검하면서 사용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너무 낡았다면 과감히 버리는 것을 주저하지 말기를!



산은 수다스럽다


몇 해전 무작정 남쪽 바다로 짧은 여행을 떠난 일이 있습니다. 계획에 없던 길이라 아무런 정보 없이 새벽에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도착해서 숙소를 구하는 것도 애를 먹었지요. 핸드폰도 없어 거리의 PC방에서 하나 둘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렇게 충동적인 여행은 처음이었습니다만 나름 꽤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여행이라면 본디 특정한 목적이 있기 마련입니다. 어디를 가겠다던가 아니면 무엇을 보겠다던가 등등. 그러나 개인적으로 머리를 좀 식히고 싶어 떠난 것이기에 딱히 목적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버스에서 내려 숙소를 잡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이지요. 일단은 바닷가를 좀 걸었습니다. 다리가 아플 때까지, 발바닥에 통증을 느낄 때까지 오래 걸었습니다. 무작정 걷다 인적이 뜸한 곳까지 와서 다시 돌아가는 데 애를 먹은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냈지만 다음 날도 똑같이 무작정 걸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눈에 잡히는 대로 마구 걷다 결국엔 관광지도를 집어 들었습니다. 남쪽 바다니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더군요. 새벽같이 일어나 일출을 볼 자신은 없고, 넓은 바다나 구경하자며 그곳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지도를 보고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생각보다 거리가 멀었습니다. 


한참을 가서 버스가 회차하는 곳에 내렸어요. 산을 등지고 있는 작은 마을에 내렸습니다. 지도를 보면 여기서 해안을 따라 조금 걸으면 되는데 당최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인적이 뜸한 곳이었는데 다행히 노인 한분이 보여 길을 물었습니다. ‘거기? 이 길로 가면 되는데… 혼자 가려구?’ 나중에야 혼자 가려느냐는 그 질문이 무슨 뜻인지 알았어요.


마을을 끼고 난 작은 산길을 올랐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생각으로 혼자 그 길을 갔는지… 버스로 온 길이 지도에서 본 것보다 훨씬 멀다는 것을 진작이 깨우쳐야 했습니다. 지도에서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였는데, 만만하게 볼 게 아니었지요. 한참을 올라가니 주위가 조용해졌습니다. 길을 따라 걷는데, 어느 순간 이 산에 나 혼자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우쳤습니다.


사실 몇 시간이나 걸었는지 모릅니다. 시계도 없이 걸었던 터라 정확한 시간을 알지 못해요. 지금 생각하면 한두 시간을 산에서 홀로 걸었나 봅니다. 도시인으로 살면서 오랜만에 경험하는 낯선 시간이었습니다. 사람 흔적은커녕 사람 소리도 없이 그저 해안을 따라 부는 바람 소리만 귀에 들렸습니다. 바닷가 산길을 걷는 것은 묘한 재미를 주더군요. 사람은 없는데 한 시도 고요한 적이 없습니다.


윙윙 부는 사람은 풀들을 스쳐 쉬쉬 소리를 내며 달려옵니다. 커다란 나무를 휘몰아 대는 바람은 삐걱삐걱 제법 큰 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거기에 파도 소리까지. 문득 이 자리에 앉아 밤을 맞으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아마 쉬이 버티기 힘들겠지요. 대낮이라 그렇지 밤이 되면 사람 소리처럼 들릴 거 같습니다. 그 수많은 아우성을 견딜 자신이 없어 발길을 재촉했습니다.


중간에 길을 잃기도 했고, 꽤 힘들기도 했지만 멋진 선물이 기다리고 있더군요. 오르다 보니 산 꼭대기까지 올랐습니다. 바위 위에 올라서니 수평선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하늘 아래 바다와 산 그리고 나 딱 셋만 있습니다. 어찌나 짜릿하던지요. 그날 거기서 땀을 식히며 전 <장자>를 생각했습니다. 장자가 말한 바다란, 하늘이란, 그리고 바람이란 이런 게 아닐까? 


<제물론>을 펼치면 장자는 수다스러운 세계에 대해 말합니다. 바람은 숲을 지나며 다양한 소리를 낳습니다. 휘휘, 스스, 우우, 웅웅… 커다란 구멍은 큰 소리를, 작은 구멍은 작은 소리를 냅니다. 그러나 장자는 또 말합니다. 그 구멍은 마치 사람의 입이나 귀 같기도 하다(似鼻 似口 似耳). 따라서 숲 속에 부는 바람도 사람 소리처럼 들립니다. 깔깔 웃는 소리, 비웃는 소리, 버럭 화내는 소리, 슬피 우는 소리 등등(激者 謞者 叱者 吸者 叫者 譹者 宎者 咬者) 장자의 그 말이 궁금하다면 조용한 산 곁에 앉아 귀를 기울여보기 바랍니다. 얼마나 산이 수다스러운지 그제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너는 들었느냐?


<소요유>가 북명北冥, 저 아득한 북쪽 바다에서 시작했다면 <제물론>은 남곽南郭, 남쪽 성 바깥에서 시작합니다. 조금 거리는 가까워졌지만 ‘바깥’이라는 점은 동일합니다. <장자>를 읽으며 이 ‘바깥’을 꼭 기억해두길 바랍니다. 지금이야 성이 무의미한 시대가 되었지만, 과거에는 성은 대단히 중요한 경계였습니다. 대표적으로 중국의 만리장성은 오랑캐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건설한 성이지요. 이처럼 성은 성안의 ‘우리’와 성 밖의 ‘낯선 사람’을 나눕니다. 


당연히 성밖에 사는 사람은 별 볼 일 없는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임금을 비롯해 고관대작들은 모두 성안, 그것도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살고 있었지요. 저는 지금 남산 자락에 사는데, 과거 조선시대에는 남산이 이와 비슷한 곳이었습니다. 남쪽 성문, 숭례문 바깥의 이 산자락은 성문에 채 들어가진 못한 사람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성안의 눈으로는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지요.


따라서 ‘남곽자기南郭子綦’라는 말에는 비하의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한편 그의 제자로 소개된 ‘안성자유顏成子游’는 반대입니다. 이름의 해석을 두고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자유子游’는 공자의 제자를 떠오르게 합니다. 남쪽 성 밖의 별 볼 일 없는 이의 제자로 공자 제자의 이름을 쓰다니. 여기에는 기존의 관점을 뒤집으려는 의도가 보입니다. <장자>는 이런 기술을 많이 씁니다. 배울 만하지 않은 사람을 선생의 자리에 올려놓습니다. 


하나 덧붙이면 ‘누구에게나 배울 수 있다’는 식으로 장자의 말을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말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유명한 영어 학원 선생은 모두 백인일까요? 흑인 영어 교사를 만나본 적이 있는지요? 학교 선생님 가운데 장애인을 보기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장애인이 없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성평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나요? 그렇다면 트랜스젠더 교수나 동성애자 교수를 상상해보세요. 제법 평등한 사회가 되었다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배울 만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시선을 뒤집었듯, 배울만하지 않은 사람을 선생으로 세우며 뒤집었듯, 장자는 또다시 뒤집습니다. 남곽자기의 가르침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가르침이 아닙니다. 알만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남곽자기는 사람의 피리, 땅의 피리, 하늘의 피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람의 피리는 사람이 입에 물고 불어대는 피리소리를 말한 것입니다. 땅의 피리란 바람이 불어 숲 속 나무의 구멍을 지나며 나온 소리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피리란 무엇일까요? 남곽자기는 그게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남곽자기의 이 불친절한 대답 때문에 이 이야기에 대한 해석은 무척이나 많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하늘의 피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남곽자기 앞에서 이야기를 들었던 안성자유는 어땠을까요? 그는 우리와 달리 뭔가 깨우치는 것이 있었을까요? <장자>는 남곽자기의 말로 끝납니다. 그것도 이런 질문으로. ‘피리를 풀어대는 것은 누구일까?(怒者其誰邪)’ 질문으로 보건대 안성자유도 우리와 별 차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물음만 남기고 대화가 끝나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물음이야 말로 <장자>의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뒤에 나온 설결과 왕예의 이야기도 비슷합니다. 설결의 질문에 왕예는 이렇게 답할 뿐입니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吾惡乎知之)’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기까지 합니다. ‘내가 안다고 말한 것이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님을 어찌 알겠으며, 내가 알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 아는 것이 아님을 어찌 알겠느냐?(庸詎知吾所謂知之非不知邪 庸詎知吾所謂不知之非知邪)’ 이 말을 가지고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으나 그러지는 않으려 합니다. 어쨌든 장자가 당혹스러운 질문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명쾌함보다는 찝찝함, 이것이 <장자>와 같은 글이 주는 매력입니다. 어느 철학자의 말을 빌리면 몸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끙끙대게 만드는 글. 갑갑함을 선물하는 글.


장자는 사람이 피리를 불어대듯 땅의 바람이 나무 구멍으로 소리를 낸다고 했습니다. 소리란 바람이 구멍을 통과할 때 납니다. 바람이 그치면 소리도 사라지지요. 따라서 피리 소리는 피리의 것이 아닙니다. 앞서 수다스럽다고 말한 산도 사실은 틀린 말입니다. 산은 말하지 않습니다. 피리가 소리를 내지 않듯. 무엇인가 불어대는 것이 있어야 소리가 납니다. 


비록 하늘의 피리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문득 우리는 이 피리와 비슷한 것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구멍 난 존재. 바로 ‘인간’입니다. 앞당겨 이야기하면 장자는 인간의 얼굴에는 총 7개의 구멍이 있다고 말합니다. ‘눈, 코, 귀, 입’이 바로 그것이지요. 인간도 하나의 피리와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꾸로 이렇게도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피리 소리가 본디 피리의 것이 아니듯, 일곱 개의 구멍을 통해 받아들인 ‘감각’도 ‘나’의 것이 아닌 게 아닐까?


마찬가지로 불어대는 바람이 그치면 피리는 아무 소리를 내지 못하듯, 우리도 불어대는 바람과 같은 무엇이 그친다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게 되는 건 아닐까? 그처럼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정적 속에 사라질 때 우리가 감각하게 되는 건 무엇일까? 그때에도 우리는 무언가를 들었다고, 무언가를 느꼈다고, 알았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나를 잃었다.


지금 나는 나를 잃었다. 今者吾喪我

안성자유가 남곽자기를 보았을 때 어떤 낯선 감각을 느낍니다. 스승의 모습이 어제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안성자유의 표현을 빌리면 마치 ‘죽은 재(死灰)’처럼 되었습니다. 아무 생기가 없는 텅 빈 몸. 그 까닭을 묻지 남곽자기는 ‘오상아吾喪我’, 나를 잃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장자>를 관통하는 매우 핵심적인 말입니다.


남곽자기가 자신을 잃었다고 했을 때, 제자 안성자유가 죽은 재와 같다고 했을 때, 이는 남곽자기라는 고유한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연 나를 ‘나’라고 하는 고유함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요? 누군가는 이름을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름은 바뀔 수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특정한 관계를 말하기도 할 것입니다. 누구의 무엇이라는 관계. 그러나 관계는 늘 바뀔 수 있습니다. 


근대 철학의 문을 연 데카르트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생각하는, 데카르트의 맥락을 빌리면 ‘의심한다’는 내가 있다는 말입니다. 정확히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이 생각과 비슷한 한자어로 ‘지각知覺’이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느끼고 안다는 뜻입니다. 따져보면 그렇습니다. ‘나’라는 것은 ‘내’가 느끼고 안 모든 감각, 기억, 경험의 총체 아닐까요? 다르게 말하면 이름이 바뀌어도 우리는 바뀌지 않지만, 감각과 기억이 달라지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됩니다. 


이 변화의 가능성은 거꾸로 내가 ‘나’라고 생각해왔던 것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음을 알려줍니다. ‘나’라고 생각되었던 감각의 뭉치는 사실 일시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장자는 기존에 있었던 생각을 버릴 것을 요구합니다. 이를 <장자>의 용어로 말하면 ‘성심成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풀이하면 만들어진 마음, 다르게 말하면 그렇게 구성된 ‘나’라는 자각을 말합니다. 그런데 장자는 그렇게 구성된 ‘나’라는 존재가 결코 고유하지 않으며 이는 제한적인 형식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장자가 빌려오는 것은 당대에 유행했던 일종의 논리적 논변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이것이 있다고 하면 반드시 저것이 있게 됩니다. ‘옳음’이 있다면 ‘그름’이 있기 마련이지요. 이처럼 한쪽이 만들어지면 다른 한쪽이 만들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함께 생겨남(方生)’이라 합니다. <제물론>에서는 이 짝을 여럿 이야기합니다. 있음과 없음, 아름다움과 추함, 삶과 죽음 등등. 이렇게 보면 세계는 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편 ‘만듦(成)’의 짝은 ‘망가짐(毁)’이겠지요.


결국 우리는 또 다른 앎에 도달하게 됩니다. 앞서 장자는 ‘성심成心’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방금 말한 짝을 대입하면 ‘만들어진 마음’이란 거꾸로 ‘망가진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대체 왜 그럴까요? 우선 세계는 무엇이라 지칭할 수 없는 무한한 대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엇’이라 지칭하는 것은 늘 그 대상의 일부만을 말하는 것이지요. 전체는 무엇이라는 정의와 떨어져 있습니다. 임시적인 말을 빌어 잠깐 이해할 뿐입니다. 한편 무엇이라는 정의는 다른 가능성을 제한합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특정한 틀에 가두어 버리는 것이지요.


나는 ‘나’라고 불리는 그 무엇보다 큽니다. ‘나’라는 말에 무엇을 집어넣건 나는 늘 ‘나’보다 먼저 있고, ‘나’로 불리지 않는 여백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의 깊게 보았다면 눈치챘겠지만 여기서 ‘나’란 ‘나’라고 인식하고 부르는 자신을 말합니다. 다른 철학자의 말을 빌리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늘 우리가 얼마나 거대한 존재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편 다르게 말하면 ‘나’라는 지칭, 정의는 늘 나의 가능성을 제한합니다. 그 말들은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들’, 수많은 가능성에 주목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무엇이라 불리기 전, 짝을 만들어 내기 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나’라는 자각이 일어나기 이전 ‘나’를 잃어버린 그 순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어떤 상태. 미처 말로 튀어나오지 않은 그 무엇! 왜냐하면 시작에 앞서 시작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자의 말을 간단치 않습니다. ‘시작하지 않음’ 조차 시작하지 않았을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有始也者 有未始有始也者 有未始有夫未始有始也者)


이쯤 되면 아마 머리가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사실 저도 <장자>의 이야기를, 특히 <제물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노라면 머리가 아득해지곤 합니다. 이건 저만 그런 건 아닙니다. 장자도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지금 내가 말했는데, 내가 말한 것이 과연 말을 한 것인지 말을 하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다.(今我則已有謂矣 而未知吾所謂之其果有謂乎 其果無謂乎)’


아리송함, 어떤 흐릿함, 당혹스러움… 장자가 <제물론>을 통해 선물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장자는 단순히 ‘기존의 상식을 내려놓아라’라는 말로 그치지 않습니다. 아예 생각 자체를 멈춰버릴 것 같습니다. ‘다른 것’을 생각하라는 말이 아닌, ‘생각’ 자체에 대한 질문. 이 질문에 풍덩 빠졌기에 남곽자기는 죽은 재 마냥, ‘나를 잃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자>를 잘 읽었다면 나를 잃었다는 남곽자기의 말 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무언가를 잃었다’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어떤 상실감, 균열, 틈이 생겨버렸습니다.


무언가 선명하던 세계가, 나를 비롯해 주변의 모든 것이 흐려져 보입니다. <장자>의 표현을 빌리면 이를 ‘망량罔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옅은 그림자’로 풀이되는 이 주변의 흐릿한 존재는 그림자에게 따져 묻습니다. ‘너는 왜 지조가 없느냐? 섰다 앉았다 멈췄다 걷다 하느냐?’ 이 질문에 그림자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내가 기대고 있는 것 때문이지. 그런데 내가 기대고 있는 것도 또 무언가에 기대고 있어서 그러지 않을까? 그럼 내가 기대고 있는 것은 뱀의 껍데기, 매미의 날개 같은 것 아닌가? 그런지 어찌 알겠으며 그렇지 않은지 어찌 알겠는가?(吾有待而然者邪 吾所待又有待而然者邪 吾待蛇蚹蜩翼邪 惡識所以然 惡識所以不然) 


혹시나 하여 덧붙이면, 이런 무서운 질문 끝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결론이 오는 건 아닙니다. 우리에게 삶이 주어진 바 어떻게든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맙시다. 목표 없이, 목적 없이, 방향 없이도 우리는 잘 살 수 있습니다. 마치 길 없는 대지 위에서도 발길을 내딛을 수 있듯. 다만 예민하게 감각을 세워야 합니다. 이 예리한 감각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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