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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May 30. 2017

<양생주> & <인간세> 가시밭 길을 걸어가며

지식에서 깨우침으로


양생주는 짧은 격언으로 시작합니다. 


吾生也有涯 而知也无涯 以有涯隨无涯 殆已 已而為知者 殆而已矣

유한한 삶과, 무한한 앎 이 간극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이 주제는 <장자>의 앞부분에서도 논의되었던 것입니다. <소요유>에서 이미 알 수 없는 세계, <양생주>의 표현을 빌리면 무한한 세계에 대해 말해주었지요. 한편 <제물론>에서는 우리의 앎-인식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무한한 세계의 일부만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장자>의 문장은 ‘알려고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명령으로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문구에 집착하지 않고 생각해보면 앎을 부정하는 것만 있는 건 아닙니다.


무한한 세계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 여기서 누구는 겸손함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앎의 한계를 인정하며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염두할 것. 한편 단편적 앎을 뛰어넘은 또 다른 앎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단편적이며 제한적인 앎이 아닌 세계 전체를 조망하는 앎. 


저는 개인적으로 <장자>가, 또한 이 문장이 앎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장자 역시 우리에게 어떤 깨달음을 전해주고자 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앎’이라 말할 때에는 크게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식 또 하나는 깨우침. 전자가 어떤 대상에 대한 것이라면 후자는 지식을 포괄한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것입니다. 전자의 지식은 특정한 쓰임에 국한되지만 후자의 깨우침은 삶의 태도를 바꾸어냅니다. 요약하면 <장자>는 깨우침을 이야기하는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치밀하게 논하면 지식에도 여러 가지 층위가 있을 것입니다. 논의를 간단히 하기 위해 가장 일반적인 지식, ‘사전적 지식’을 생각해봅시다. 사전을 찾아보면 나오는 선명한 정의, 바로 써먹을 수 있는 도구적 지식이 있습니다. 실생활에서도 이러한 지식이 빛을 발하지요. 아마 인터넷의 ‘검색’은 대부분 이런 지식을 위해 사용될 것입니다. 저도 이런 지식을 이용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낯선 곳에서 맛난 식당을 찾을 때.


검색을 통해 접근할 때에도 실패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런 경우는 접어둡시다. 어쨌든 이런 단편적인 지식이 유용할 때가 많은 건 사실입니다. 이런 지식을 많이 알고 있으면 그런대로 삶이 참 편합니다. 그런데 거꾸로 다른 식의 앎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맛집 리스트를 모르더라도 맛집을 찾는 방법에 대한 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이 즐겨 찾는 음식점이라던가, 터미널이나 역세권보다는 직장인들이 주로 찾는 집이라던가, 소수의 메뉴만을 다루는 집이라던가 등등. 


따져보면 이런 기술이나 요령도 중요합니다. 특히 우리가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는 이런 기술이 더욱 필요하지요. 앞서 말한 깨우침은 이런 기술이나 요령이 극대화된 앎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앞서 소개한 사전적 지식처럼 선명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똑 부러지게 이렇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 없을 때가 많을뿐더러, 그 쓰임이 분명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익히기도 쉽지 않구요. 


포정의 칼 놀림


<양생주>에서는 포정의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이 이야기는 포정해우庖丁解牛라는 고사로 유명합니다. 귀신같은 기술을 이야기하는 사자성어이지요.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문혜군이 커다란 잔치를 벌였나 봅니다. 예나 지금이나 잔치-파티에 필요한 것은 맛난 음식이지요. 맛난 음식으로는 고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문혜군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어떤 학자는 위혜왕이라 하기도 하는데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누구인가 보다 군주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한 나라의 군주가 벌이는 파티. 소 한 마리 정도는 잡아야지요.


포정은 사실 이름이 아닙니다. 포庖는 푸줏간이라는 뜻이고 정丁은 사내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정육점 주인’ 정도가 될까요? 지금이야 정육점 주인이 어엿한 사장님이지만 전통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백정白丁이라며 아주 천한 신분으로 분류되었지요. 포정은 다르게 말하면 백정이라는 직업, 나아가 천한 계급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쯤 되면 장자가 뒤집기에 능한 인물이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장자는 한 나라의 군주와 천한 백정을 대면시켜 대화를 나누게 만듭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낯선 풍경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천한 백정, 포정은 무엇인가 신비로운 이야기를 문혜군에게 들려줍니다.


사실 사건의 발달은 포정의 실력이 문혜군의 눈길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파티에는 고기 이외에도 또 필요한 것이 있지요. 바로 음악! 문혜군이 보니 포정이 연주되는 음악에 맞추어 소를 잡고 있습니다. 커다란 칼을 휘두르는 것이 음악의 리듬에 절묘하게 맞거든요. 게다가 무희들의 춤과도 제법 어울립니다. 하나의 예술적 경지에 오른 것이지요. 이에 문혜군이 감탄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재주가 어찌 이처럼 대단한가!(技蓋至此乎)”


그러나 포정의 대답은 다릅니다. “제가 추구하는 것은 도道입니다. 재주보다 나은 것이지요(臣之所好者道也 進乎技矣)” 오늘날에도 어쩐 재주에 뛰어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는 그 재주의 뛰어남이 보통 사람의 경지를 뛰어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 달인達人이라 부릅니다. 포정의 이야기를 보면 포정은 분명 달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포정은 달인에서 더 나아갔습니다. 그는 이 경지를 ‘도道’라 부릅니다. ‘도’라는 개념이 어렵지만, 보통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 그 이상이라고만 해둡시다.


신묘막측한 기술. 보통 사람은 물론 달인들도 혀를 내두르는 경지가 있습니다. 이를 두고 도통道通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포정은 달인을 뛰어넘어 도통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라 할만합니다. 보통 평범한 백정은 매달 칼을 바꾸어야 합니다. 뼈를 자르느라 칼이 상하기 때문이지요. 달인이라면 칼을 1년은 쓸 수 있습니다. 고작 1년이라니 의문이 든다면 주방에서 칼질을 해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야채만 썰어도 칼날이 점점 무디어집니다. 고기를 썰면 더욱 빨리 칼날이 무디어지지요. 살을 가르는데도 칼이 조금씩 닳습니다.


그런데 포정의 칼은 19년이나 썼답니다. 그런데도 방금 숫돌에 갈아낸 듯 칼날이 매우 날카롭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포정의 칼이 특별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포정의 대답은 다릅니다. 그는 살과 살 사이 뼈와 뼈 사이로 칼날을 움직였다고 합니다. 즉 포정의 실력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뼈를 자르고, 살을 베었다면 포정의 칼놀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살을 베는 것이 아니라 결을 따라 살을 떼어냈다 말합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요? 글세요. 소 잡는 것은커녕 칼질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우리는 참 알기 힘든 말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영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압니다. 고기에도 결이 있다는 것을. 자르는 방향, 자르는 방법에 따라 고기의 육질이 달라집니다. 잘못 자르면 쓸데없이 고기가 질겨지지만 잘 자르면 입에서 살살 녹는다는 표현처럼 술술 넘어갑니다. 이 결을 치밀하게 잘 아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포정의 이야기를 읽으면 식탁에 오른 갈치가 떠오릅니다. 여러분도 알듯이 갈치는 뼈가 많은 생선입니다. 그런데 생선 살이 매우 달콤한 녀석이지요. 그래서 좀 먹는 게 까다롭습니다. 갈치를 먹는 모습을 보면 잘 먹는 사람과 잘 먹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나 다른지요. 잘 먹지 못하는 사람은 말 그대로 뼈와 살을 마구 뒤섞어 먹습니다. 뼈째 통째로 씹어 먹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러기 쉽지 않지요. 결국 날카로운 뼈를 뱉어가며 먹습니다. 영 요령이 없는 까닭입니다. 잘 먹는 사람은 다릅니다. 뼈와 살을 분리해서 살만 똑 떼어먹습니다. 먹고 나면 식탁에 뼈만 깨끗이 남아 있어요. 도구의 문제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끝이 뭉툭한 젓가락을 가지고도 어찌나 잘 먹는지! 


포정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이해야 할까요? 저는 포정이 잡는 소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포정이 손에 쥔 칼은 우리의 삶을 말합니다. 제한적인 삶으로 만만치 않은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누구는 금방 자신을 소진해버립니다. 누구는 19년, 아니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내도 상처입지 않습니다. 바로 칼을 놀리는 기술, 삶을 다루는 기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 손에 쥐어진 칼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포정은 어떤 특정한 깨우침이 있으면 삶을 다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리라 말합니다. 그렇기에 문혜군은 포정의 말에서 ‘양상養生, 삶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러한 앎은 말로 해 주어도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장자> 뒷부분에 보면 바퀴통을 깎는 노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포정이 문혜군과 대화를 나누었듯 이 바퀴통 깎는 노인은 제환공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제환공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바퀴통은 바퀴 구멍에 딱 들어맞아야 하는데 이를 자식에게도 알려줄 수 없어 자신이 노인이 되도록 지금까지 이렇게 바뀌통을 깎고 있노라고. 그렇습니다. 어떤 기술은 도저히 말로 설명해줄 수 없습니다.  


기왕 먹는 이야기가 많으니 요리 이야기를 해봅시다. 요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요령의 총집합입니다. 똑같은 재료, 똑같은 레시피를 주도 두 사람에게 요리를 시키면 같은 음식이 나올까요?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다른 맛의 요리가 나옵니다. 똑같은 재료와 똑같은 방법으로도 누구는 천상의 맛을 냅니다. 어떻게? 요렇게 요렇게 하면 된다고 말해줍니다. 참 쉽죠? … 그런데 해봐도 안 됩니다.


포정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포정도 처음부터 도통한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무수한 소를 잡으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다만 하나의 중요한 지적이 있습니다. ‘감각을 멈추자 신神이 움직였다(官知止而神欲行)’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는 것 따위의 감각을 접어 두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신神’,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꾸면 ‘감’이 생겨납니다. 감을 익히는 방법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포정의 이야기가 삶을 잘 다루는 방법에 대한 것이라면 그 방법을 익히는데 필요한 것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에 멈추지 않는 태도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말해주어도 듣지 못합니다. ‘이것’이라는 단편적 지식이나 설명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깨우침은 바로 이것들이 사라진 뒤에 찾아옵니다. 따라서 포정의 이야기는 두 가지 중요한 지점을 말합니다. 첫째. 일단 ‘나’를 내려놓을 것. 내가 보고 듣고 하는 것 따위를 접어둘 것. 둘째. 직접 경험할 것. 감은 그 누구도 나에게 전해줄 수 없는 것이니. 


장자는 말합니다. ’나’를 내려놓고 온몸으로 직접 부딪힐 것. 그럼 어느 순간 틈이 열리는 지점을 볼 수 있다고. 


구불구불 가시밭길을 걷노라


<인간세>는 제목처럼 인간 사이의 여러 사건들을 다룹니다. 특히 고민상담이 주를 이룹니다. 첫째 이야기는 제자 안회가 공자에게 질문합니다. 위나라 임금이 제멋대로 나라를 휘두른다니 가서 그를 바르게 이끌까 한다고. <논어>를 조금 읽었다면 좋겠지만 전혀 내용을 모른다면 이 둘의 대화가 무슨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알기 힘듭니다. 여러 복잡한 배경을 추리고 간략하게 내용을 요약하면 공자는 제자의 발걸음을 막습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서. 두 번째는 섭공 자고가 공자에게 질문합니다. 사신으로 이웃 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스트레스가 심하다. 어찌해야겠는가? 여기에 답하는 공자의 대답도 별로 신통치 않습니다. 어찌할 수 없지 않으냐고 그저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마지막은 안합과 거백옥의 대화. 위나라 태자가 멋대로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질문. 해석의 논란이 좀 있지만 이 역시 크게 역할 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세 이야기에서 질문을 던지는 것이 모두 아랫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상황이 다르지만 모두 ‘을’의 입장을 논한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군주와 신하라는 관계처럼 갑과 을이라는 관계에서 신하-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여기서 장자의 대답은 일관됩니다.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왜? 압도적인 힘의 차이 때문에. 이를 잘 보여주는 고사가 바로 당랑거철螳螂拒轍의 고사입니다. 


“그대는 사마귀를 모르는가? 성을 내며 수레바퀴를 상대하겠다고 덤벼들지만 감당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네. 자기의 재주를 뽐낼 줄만 알면서 말일세.(汝不知夫螳蜋乎 怒其臂以當車轍 不知其不勝任也 是其才之美者也”

사마귀는 성을 잘 내는 곤충입니다. 조금 건드리면 앞발을 치켜들고 매서운 눈을 치켜뜨며 공격태세를 갖춥니다. 실제로 곤충 가운데는 사마귀를 상대해서 이길 수 있는 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레바퀴라면 어떨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짓눌려 죽을 뿐이겠지요. 장자가 보기에 신하들의 힘이란 사마귀와 같습니다. 군주는 거대한 수레바퀴인데 맞서 보겠다며 대들면 어떨게 될까요? 백전백패!! 이길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비관적인 사유입니다. 그러나 따져보면 이런 부분이 우리 사회에 영 없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회는 저마다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장자 시대에 군주의 위세가 마치 눈 앞에 굴러오는 거대한 수레바퀴와도 같은 것이었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그처럼 무시무시하게 닥쳐오는 건 무엇일까요? 한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 


누구에게는 그것이 교육제도일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학교라는 기관일 수 있고, 국가라는 집단, 나아가 자본주의라는 체제일 수도 있습니다. 장자는 그 가운데 도저히 바꿀 수 없는 게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일단 접어둡시다. 사람마다 시대마다 사회적 조건마다 그것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지요. 다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우리가 도저히 바꿀 수 없는 게 있습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물론 그것을 상대하겠다고 덤볐다가는 크게 화를 입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간세>의 마지막을 보면 공자가 다시 등장합니다. 초나라 미치광이 접여가 공자에게 노래를 불러줍니다. 이 노래는 매우 의미심장하니 아래 그 내용을 인용해봅니다.


鳳兮鳳兮 何如德之衰也    봉황새야 봉황새야 세상이 망가진 것을 어떻게 할까.
來世不可待 往世不可追也   미래를 기대할 수도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네
天下有道 聖人成焉    세상이 잘 돌아가면 성인이 업적을 이루나
天下無道 聖人生焉    세상이 어지러우면 성인도 살아갈 뿐
方今之時 僅免刑焉    지금은 겨우 형벌을 면할 수 있을 뿐.
福輕乎羽 莫之知載    깃털보다 가벼운 복을 받을 줄도 모르고,
禍重乎地 莫之知避    이 땅보다 무거운 화를 피할 줄도 모르는구나.
已乎已乎 臨人以德    그만두어라 그만둬! 사람을 이끌겠다는 마음을
殆乎殆乎 畫地而趨    위험하도다 위험해! 자기 이상대로 살아가는 것이
迷陽迷陽 無傷吾行    가시나무야 가시나무야! 내 가는 길을 다치게 하지 말아라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얻기 위해 천하를 떠돌아다닌 것으로 유명합니다. 비록 앞에서는 제자 안회와 섭공자고에게 신하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충고를 했지만 여기 <인간세> 마지막에 보이는 공자의 모습은 이상을 좇아 떠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치광이 접여의 말을 빌어 장자는 그 노력이 헛수고일 거라 말합니다. 왜? 지금은 겨우 형벌을 피할 수 있을 시대라고.


모든 시대에는 음과 양이 존재합니다.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이 함께 있지요. 어떤 사람은 시대의 밝은 부분에 주목합니다. 반대로 시대의 어두운 부분에 주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장자는 정확히 후자입니다. 그는 한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예민하게 느꼈던 인물입니다. 전쟁이 일상이 된 시대, 사람의 목숨이 가볍게 내던져지는 시대라고 장자는 이야기합니다. 위대한 성인조차도 겨우 살아갈 길을 찾기에 바쁜 시대라고. 


미래도 기대할 수 없고 과거로도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은 장자 본인의 좌절을 잘 보여줍니다. 더 문제는 우리 앞에 놓인 것이 가시밭길이라는 점. 죽지 않더라도 상처입지 않고 살아가기 힘든 시대. 장자가 권하는 발걸음은 비틀비틀 가시밭길을 피하면 걷는 것입니다. 그만큼 장자는 그의 시대가 폭력이 일상이 된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의 관심사는 상처입지 않는 것.


그런데 문제는 스스로 그 폭력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삶이 있다는 점입니다. 장자의 말을 빌리면 스스로의 몸을 불태우는 사람들. 작은 쓸모 때문에 베이고 꺾이는 사람들. 이들은 쓸모 있음의 쓸모만 알뿐, 쓸모없음의 쓸모(無用之用)는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쓸모없는 것에 있습니다. 쓸모야 말로 자신의 삶을 해치는 커다란 해악이기 때문입니다.


쓸모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매일 고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런 장자의 말은 별로 달갑지 않은 말일 것입니다. 기운 빠지게 대체 이런 이야기를 왜 읽고 있어야 하는지 질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장자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가 던지는 질문은 충분히 의미 있습니다. 첫째, 그 많은 쓸모란 대체 누구를 위한 쓸모인가? 우리가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이유는 우리가 누구에겐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아닌가요? 정작 나의 쓸모란 접어두고 남의 쓸모를 좇아 사는 건 아닐까요? 둘째,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희생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낳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장자는 정말 그런지 냉정하게 돌아보라 말합니다. 정말 그런가? 현재의 고통은 그저 고통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장자는 쓸모 있는 사람을 재목材木에 비유했습니다. 재능을 가리키는 ‘재才’라는 글자와 비슷하지요. 그런데 재목에게는 늘 슬픈 미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잘려야 쓰일 수 있는 것이지요. 자신의 생명력, 자기 고유의 삶을 내버려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장자 본인의 질문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훗날 사람들은 여기서 커다란 물음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셋째, 아무리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하더라도 나의 삶보다 더 가치있는 것일까? 천하보다, 세계보다 내 생명이, 내 삶이 더 소중한 건 아닐까?


장자가 살아간 춘추전국 시대는 커다란 전환의 시대였습니다. 과거의 가치가 수명을 다해버려 새로운 가치를 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골몰했던 시대였습니다. 한편 새로운 세계를 만들겠다며 수많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힘을 겨루었습니다. 나라 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죽음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도 이와 비슷하지 않나 질문해봅니다. 과거 전통과 단절하여 새로운 시대(근대)를 열었다고 했지만 너무도 빨리 근대의 끝을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과거 미래는 진보의 다른 말이었지만 지금은 미래는 말 그대로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며, 미지未知 알 수 없는 물음표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회적인 폭력은 수위가 점점 올라갑니다.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는 무연고 자살을 비롯하여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의 삶을 보면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도 장자처럼 굽이굽이 조심조심 발걸음을 내디뎌야 하는 건 아닐까요? 가시밭길에 당당히 맨몸으로 똑바로 나아가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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