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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un 14. 2017

<덕충부> 진정으로 잊어야 할 것

못난이 만세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장자는 칠원리漆園吏, 그러니까 옻나무 동산의 관리였답니다. 산을 가까이해서일까요? <장자>에는 숲과 나무에 연관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소요유>에 나왔던 쓸모없는 나무를 기억하는지요? 한편 <제물론>은 숲에서 울리는 소리로 시작합니다. <인간세>에서도 나무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등장합니다. 


<인간세>에는 두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바로 쓸모없는 나무의 이야기이지요.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장석이라는 이가 길을 가다 커다란 나무를 만납니다. ‘장석匠石’이라는 이름도 앞서 보았던 포정이라는 이름과 비슷합니다. 이름에 목수라는 뜻이 들어 있어요. 목수는 무얼 하는 사람인가요? 맞습니다. 나무로 도구를 만드는 사람이지요. 길을 가는데 눈 앞에 엄청나게 커다란 나무가 등장했습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수천 마리 소를 가릴 정도랍니다. 밑동은 백 아름 정도, 가지를 자잘라 배를 만들 수도 있다네요. 어찌나 큰지 사람들이 그 아래 모여 이 커다란 나무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수는 그냥 휙 지나가버렸답니다. 이 커다란 나무에 정신을 빼앗긴 제자가 한참 뒤에 좇아와 물었어요. 제가 스승님을 따라다닌 이래로 이처럼 커다란 나무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쳐 가시다니요. 그러나 목수가 이렇게 말했다지요. 저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무야. 그러니까 저렇게 클 수 있었지.


하긴 맞습니다. 쓸모 있는 나무는 금방 베어버리지요. 언젠가 금강 소나무 숲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이 나무는 매우 훌륭한 목재라고 해요. 그래서 궁궐을 지을 때나 임금의 관을 짜는 데 사용되었답니다. 그런데 이 멋진 소나무 가운데 몇 백 년 넘은 나무를 찾기 힘들다고 해요. 왜냐하면 어느 정도 자라면 베어갔기 때문이지요.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목상木商은 이렇게 말합니다. ‘못난 나무가 산을 지킨다.’


이어지는 남백자기의 이야기도 비슷해요. 쓸모없이 커다란 나무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한 술 더 떠서 이렇습니다. 어찌나 기괴하게 생겼는지 뿌리며 가지가 모두 휘어져 꼬인 데다, 잎에서 괴이한 냄새까지 난다고 해요. 쓸모없을 뿐만 아니라 위험한 나무! 그런데 남백자기는 이 나무를 ‘신인神人’, 신묘한 사람에 비유합니다. 따라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장자가 이야기하는 신묘한 사람이란 쓸모없는 것은 물론 어딘가 위험한 사람이라고. 


잠깐 장석의 이야기로 돌아옵시다. 장석은 제齊나라로 가다 곡원曲轅이라는 곳에서 이 커다란 나무를 보았다고 해요. 그리고 이 커다란 나무를 만난 뒤 돌아와 꿈속에서 나무가 등장합니다. 당시 제나라는 아주 강력한 나라였어요. 장자가 살았던 전국시대는 크게 7개의 나라가 천하를 두고 힘을 다투었습니다. 이를 전국 7웅이라 부르는데 제나라는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매우 강력해서 나머지 여섯 나라의 견제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부강한 나라였던 만큼 여러 인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 유명한 맹자도 제나라를 찾아간 여러 인재 가운데 한 명이었답니다. 이런 배경에서 생각하면 장석도 그런 인재들처럼 뭔가 큰 꿈을 가지고 제나라로 가는 건 아니었을까요? 장석은 자기 재능을 펼칠 기회를 얻기 위해 부강한 나라를 찾아가는 인물을 빗대어 표현한 것입니다. 나무의 비유를 참고하면 장석이야 말로 재목材木으로 인정받고 싶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남백자기- 맞습니다. 이 인물은 <제물론> 앞에 나왔던 남곽자기와 같은 인물이에요. -는 이 괴이한 나무를 신묘한 사람에게 비유했어요. 따라서 장석이 만난 커다란 나무도 사람을 비유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꿈을 품고 제나라로 가는 길에 수많은 사람을 이끄는 인물을 만납니다. 커다란 사람. 그는 어떻게 저토록 큰 인물이 될 수 있었을까요? 장석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세상에 필요 없는 사람이어서 그렇다.

 

아마도 장석은 제나라에서 별 소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왔을 거예요. 빈 손으로 집에 돌아온 그에게 그 괴이한 나무가 나타납니다. 꿈에 나온 나무는 장석을 꾸짖지요. 넌 나를 무엇에 비유하려 했던 것이냐? 열매가 달리는 저 나무들을 보라! 저 나무들은 그 열매 때문에 결국 찢기고 뜯기며 나아가 잘리기도 한다. 결국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저에게 준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만다. 그 쓸모없음이 나에게 커다란 쓸모가 되었다!


쓸모를 좇아 나아갔던 그에게 괴이한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떻게 들렸을까요? 쓸모를 좇아 살았던 사람에게 쓸모없는 나무의 이야기는 낯설기만 합니다. 사실 우리도 별 차이는 없습니다. 늘 우리가 들어왔던 이야기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라’는 말이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상식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쓸모없는 것이 나에게 커다란 쓸모라고.


사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쓸모’가 과연 누구를 ‘위한’ 쓸모 인가하는 점입니다. 과연 우리는 누구를 위한 쓸모를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장자의 이야기를 돌리면 이렇습니다. 제나라, 혹은 군주들의 쓸모가 과연 나에게도 쓸모 있는 것일까? 나무의 비유를 참고하면, 과연 열매란 누구의 쓸모일까요? 더 중요한 질문은 어떤 쓸모냐 하는 것보다, ‘나’에게 쓸모 있는 것이 무엇인가 아닐까요? 장석은 괴이한 나무를 손가락질했지만, 나무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네가 무시했던 그 쓸모없음이 나에게 커다란 쓸모가 되었다.


‘지리소支離疏’라는 기이한 인물이 있습니다. 이름부터 참 재미있어요. ‘지리支離’는 못났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쓰는 표현이에요. 지리멸렬支離滅裂이라고 할 때 그 ‘지리’입니다. 한편 ‘소疏’는 엉성하다는 뜻입니다. 역시 좀 못났다는 뜻이 담겨 있지요. 우리말로 억지로 옮긴다면 ‘못난 못난이’라고 할까요? 이런 이름을 얻은 데는 그의 몸도 큰 이유가 되었습니다. “頤隱於臍,肩高於頂,會撮指天,五管在上,兩髀為脅” 풀이하면 턱이 배꼽을 가리고, 어깨는 정수리보다 높으며, 상투는 하늘을 가리키고, 등이 굽어 솟아오른 데다, 두 넓적다리는 옆구리에 붙었다니! 이는 곱사등이를 묘사한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이를 보고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어요. ‘저 사람 구실 하겠어?’ 그런데 장자는 이 통념을 뒤엎어 버립니다. 그래도 바느질에 빨래며, 키질을 해서 잘 먹고 산다고. 그것뿐인가요? 장자는 또 다른 부분에 주목합니다. 나라에서 군인을 징집할 때나 노역 일꾼을 모을 때에 지리소는 거리낌 없이 돌아다닙니다. 도리어 양 팔뚝을 걷어붙이고 당당하게 사람들 사이를 누비지요. 


당시 징집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전쟁터에 끌려갔다 성하게 돌아오기 어려웠지요. 그것뿐인가요. 노역 일꾼으로 끌려 가도 쉽게 돌아올 날을 기약하기 힘들었습니다. 일이 매우 고되어 노역 중에 죽는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먼 길을 오가야 했기 때문에 중간에 병이 들어버리는 일도 있었어요. 때문에 군인이나 노역꾼을 모을 때 숨거나 도망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리소는 반대로 당당하다고 해요. 왜? 자신은 끌려갈 일이 없으니까. 한편 그는 나라에서 주는 곡식이며 땔감은 꼬박꼬박 받아갑니다. 그것도 맨 앞에 서서. 


이 이야기를 통해 장자는 세상에서 말하는 ‘못난이’가 과연 정말 못나기만 한 것인지 묻습니다. 못난이도 못난이의 장점이 있지요. 좀 전의 질문을 참고하면, 사람들이 못났다고 손가락질하는 점은 지리소 본인에게는 훌륭한 덕德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못난이 만세!’



외발로 걸어가기


<덕충부>를 펼치면 외발이들이 나옵니다. 사실 <장자>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외발이가 꽤 많습니다. 대체 왜 그런 것일까요? 이는 당시 고대의 형벌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형벌刑罰’이라는 글자를 보면 ‘칼刀=刂’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습니다. 즉, 옛날의 형벌은 칼로 집행되었어요. 고대 사회에는 형벌로 육형肉刑이 있었다 해요. 가장 가벼운 형벌은 죄목을 얼굴에 새기는 경형黥刑이 있습니다. 그보다 무거운 죄를 지으면 월형刖刑을 받았습니다. 월형은 발 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이었다고 해요. 


<덕충부>에 등장하는 외발이들은 모두 이 형벌을 받은 이들입니다. 요즘 말로 바꾸면 범죄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오늘의 범죄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당시의 범죄자는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는 점이지요. 한번 상상해봅시다. 사람마다 지은 죄가 겉으로 드러나있다면 과연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거리에서 이들를 마주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결코 달갑게 생각하지 않을 게 분명합니다. 서로 가까지 있지 않으려 피하기 바쁠 것입니다. 


앞서 못난이에게서 덕을 발견했던 장자는 여기서도 또 새로운 전환을 시도합니다. <장자>에서는 이 범죄자들에게 사람들이 마구 모여듭니다. <덕충부> 처음에 등장하는 왕태라는 인물이 대표적입니다. 어찌나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는지 공자의 무리를 압도할 정도였다고 해요. 그런가 하면 장자는 이들에게도 훌륭한 덕이 있다 말합니다. 왕태는 공자조차 스승으로 삼으려 했던 인물이었으니까요.


장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사람은 저마다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느슨하게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장자가 살았던 시대는 폭력이 일상적인 시대였어요. 칼이 번뜩이는 시대에서 상처 없이 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예요. 여러 발이 잘린 사람들은 당시 이 형벌이 너무 빈번하게 행해졌다는 걸 보여줍니다. 


지금이야 덜하지만 과거에는 범죄자가 되는 게 크게 어렵지 않았어요. 집회에 나갔다가 잡혀 구속되거나 감옥에까지 가는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유명한 인물, 특히 정치 쪽에 있는 사람 가운데는 범법자들이 꽤 많습니다. 손석희, 유시민도 수의를 입고 포승줄에 묶인 사진으로 유명합니다. 현 대통령도 범죄 경력이 있지요.


발이 잘린 사람이 많다는 것은, 범죄자가 그렇게 많다는 사실은 그 시대의 폭력성을 반대로 보여줍니다. 그들 몸에 새겨진 형벌의 흔적은 그들이 얼마나 못된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거꾸로 그 시대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장자는 그 숨은 의미를 읽을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죄가 되는 시대-사회를 살았기 때문에 죄인이 된 사람들.


주의할 것은 비록 장자가 당시 시대의 모순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적극적으로 바꾸려는 태도를 갖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잘못되었으면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저 혼자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야 무언가 바꿀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정치라고 할 수 있어요. 오늘날 우리에게는 정치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다양한 도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장자는 전혀 그런 부분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우선 장자의 시대가 우리의 시대와 달리 변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도구가 부족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전통 사회에서 왕을 바꾸는 것은 오늘날 대통령을 바꾸는 것보다 몇 배는, 아니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이었을 거예요. 더 근본적인 이유는 장자의 세계 인식에 있습니다. 장자가 보는 세계는 사람의 힘으로 변화 가능한 게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조건이라고 봅니다. 그것도 매우 불친절한 조건. 


장자는 이를 ‘운명(命)’이라 일컫습니다. 운명이라니! 운명이란 적극적으로 대항해야 할 대상 아닌가요? 게다가 맞서 싸워 바꿀 수 있는 게 운명 아닌가요? 우리의 일반적 태도에서 생각하면 운명을 이야기하는 장자의 태도가 그렇게 달가운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운명에 순응하는 듯한 장자의 태도는 많은 사람에게 비판받았습니다. 너무 패배적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비판처럼 모든 것을 운명이라며 넋 놓고 있다면 결코 좋은 삶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운명이라 할 만한 것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정말로 어찌할 수 없는 삶의 조건들. 사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있다고 할 때 우리 삶은 불행해지지요. 어찌할 수 없음을 어찌할 수 없다고 인정할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게 있습니다. 이를 안명론安命論이라 부릅니다. 순응보다는 인정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


이를 위해서는 매우 차가운 시선이 필요합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잘 판단하기란 결코 쉽지 않아요. 냉철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열정 어린 시선은 할 수 없는 것을 두고 할 수 있다 말하지만, 장자의 차가운 시선은 할 수 없는 건 할 수 없는 거라고 말합니다. 도리어 중요한 것은 그런 부분이 있음을 알고 거기에 마음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할 수 없다고 기뻐하지도 말고, 할 수 없다고 슬퍼하지도 말 것.


장자가 추구하는 마음이란 마치 고요한 물과 같은 마음입니다. 이를 거울과 같은 마음이라고도 하지요. 명경지수明鏡止水!! 고요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라고 장자는 말합니다. 그때 우리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세상은 마음을 자꾸 흔들어 놓지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특히 ‘광고’가 그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어요. 광고야 말로 우리 마음을 부추기는 가장 큰 대상이 아닐까요? 보지 않았다면 고요했을 마음이 보았기 때문에 요동칩니다. 광고를 보았기 때문에 배고프고, 사고 싶고, 가고 싶고… 광고 때문에 새로운 욕망을 품은 적이 다들 있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로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보다 마음은 늘 앞서 있어요.


앞서 있지 않은 마음. 그것은 지금 현재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이 외발이들은 자신이 외발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아요. 당연히 자신이 두 발 가진 사람처럼 뛰거나 달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좌절하거나 실망할 일은 아니지요. 크게 자랑할 일도 아닙니다. 주어진 조건마다 서로 다른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외발이와 닮은 부분이 있습니다. 각자 어쩔 수 없이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현실이 있지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현실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객관적인 조건만을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욕망의 한계를 절감하는 장소가 바로 ‘현실’이지요. 그래서 이런 말이 있지요. ‘현실을 보아야지’ 이 ‘현실’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를 거예요. 그러나 누구에게나 ‘현실’은 있기 마련입니다. 장자는 이 현실을 ‘무정無情’, 좀 차갑게 떨어져 보라고 이야기합니다. 



참으로 잊어야 할 것


<덕충부>에는 또 신기한 인물이 나옵니다. 이름은 ‘애태타’! 이름부터 남다른 이 사람은 어찌나 못생겼던이 천하 사람을 깜짝 놀라게 만들 정도라고 합니다. 어떤 얼굴인지 알 수는 없으나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이라는 점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장자의 뒤집기 한 판은 여기서도 여지없이 발휘합니다. 못생겼는데 뭔가 매력이 있답니다. 그것도 모든 사람을 사로잡는 그런 매력이 있다고 해요. 남자들이 그 옆에 모여드는 것은 물론 여자들도 그 옆에 모여든답니다. 대체 이는 어떤 사람일까요?


사실 이 질문은 노나라의 군주 애공이 공자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직접 애태타를 만나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에요. 애태타의 소문이 궁금했던 애공은 직접 그를 만납니다. 역시나 못생긴 얼굴은 세상을 놀라키기 충분할 정도였다 해요.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애공은 그를 내치지 않고 곁에 두었습니다. 가만히 보아하니 뭔가 마음이 끌리는 데가 있어 나중에는 그에게 나라를 주려는 마음까지 먹게 되었답니다. 대체 무엇이 애공의 마음을 움직였기에!?


공자의 설명은 매우 길고 번잡합니다. 공자의 말을 간단히 옮기면 애태타의 그 매력은 겉보기에 있는 게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눈으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못생긴 얼굴이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라는 뜻이지요. 오늘날 사람 관계를 보면 비슷합니다. 신기하게도 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생김새와 무관하게 무어라 콕 집어 말하기 어려운 매력이라는 게 있지요. 그런 남모를 매력의 화신이 바로 애태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자는 애태타를 이어 괴이한 인물을 더 소개합니다. 하나는 ‘인기지리무신闉跂支離無脤’입니다. 이토록 긴 그의 이름은 그의 신체를 설명한 말입니다. ‘인기’는 절름발이, ‘지리’는 지리소 같은 곱사등이, ‘무신’은 언청이를 말합니다. 장자 시대에 생각할 수 있는 추한 모습을 다 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를 만난 위나라 영공 역시 그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한편 ‘옹앙대영甕盎大癭’이라는 인물도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옮기면 ‘항아리 같이 커다란 혹 덩어리’라고 할 수 있어요. 이를 만난 제환공 역시 마음을 빼앗겨버립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더 나아가 주변 사람을 다르게 보게 되었답니다. 그런 괴이한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긴 이후 주변 사람들이 달라 보였다 해요. ‘다른 눈’을 갖게 된 것이지요.


다른 눈을 갖게 된 이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주변 사람들을 적잖게 당황시켰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앞서 남백자기가 말한 신묘한 사람의 위험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다르게 보게 만든 이 낯설음은 사람들에게 어떤 불편함을 남겼을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갖고 있던 기존의 가치를 뒤집어 버리기 때문이지요. 못생긴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겨 보통 사람을 이상하게 보는 것은 물론, 아름다운 사람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을 테니까요. 


故德有所長,而形有所忘,人不忘其所忘,而忘其所不忘,此謂誠忘。

그런데 애태타, 인기지리무신, 옹앙대영을 만나 새로운 눈을 갖게 된 사람이 모두 한 나라의 군주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누구보다 인재에 목마른 사람들이었어요. 저마다 자기 나라를 부강한 나라로 만들려는 마음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어디 쓸모 있는 사람이 없나 눈에 불을 켜고 사람을 찾아보았어요. 그런데 장자는 전혀 새로운 만남이 있다고 말합니다. 괴이한 이들을 만나 이들은 세계를 새롭게 보게 됩니다. 쓸모없는 인물들이 전혀 다른 세계를 열어주었어요.


장자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잊어야 할 것이 있답니다. ‘형形’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잊어야 한답니다. 이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내면을 보라’는 것과 다릅니다. 우리가 보는 특정한 방식을 없애면 대상을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이것 말고 다른 것을 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것을 보지 않을 때 다른 것을 볼 수 있다는 말. 다른 눈은 다른 것을 열심히 보아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눈을 감을 때 우리에게 새로운 눈이 열립니다.


그런데 이 잊어버림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장자가 비판하는 형체(形)를 보는 데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에요. 일단 잊어버림 보다 더 쉬운 방법, ‘감추기’를 시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만나는데 얼굴 없이 만나보는 거예요. 그러면 얼굴을 볼 때 보지 못했던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복면가왕’이 이 의식적 망각을 이용한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굴을 보지 않고 목소리만 들을 것. 편견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볼 것. 따라서 ‘가면’이란 때로 장자식의 새로운 보기를 위해 적절히 이용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가면’을 써봅시다. 이름을 버리고 사람을 만나보는 건 어떨까요? 별명을 지어 불러 보는 것이지요. 나와 거리가 먼 별명일수록 더 좋을 것입니다. 한편 나이를 가리고 사람을 만나 보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나이에 가리워 있던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이미 이 ‘잊어버리기 & 새로 보기’를 잘 실천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아마 가장 적절한 공간이 아닐지요. 괴이한 인간들이 연이어 출현하고, 새로운 보기를 늘 강요하는 공간. 이 가상의 공간이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보기, 새로운 눈을 선물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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