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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un 21. 2017

<대종사> 다만 운명일 뿐이겠지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장자는 운명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사실 ‘운명’이라는 말을 쓰면서도 조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운명과는 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문으로 바꾸어 보면 ‘천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되는 의미로 ‘인人’이 있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천-인’간의 관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이때 보통 인人을 ‘인위人爲’로 풀이합니다. 사람이 멋대로 하는 행동을 일컫는 말이지요. 한편 ‘천天’은 ‘천연天然’, 곧 ‘자연自然’으로 많이 풀었습니다. 그런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여기서는 사람의 힘이 미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천天'을 ‘운명’이라 풀었습니다.


본디 ‘운명’보다는 ‘천명天命’이라 하는 게 더 맞습니다. 그러나 천명이라는 말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이지요. 천天과 명命에는 모두 사람의 행위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답니다. 오늘날 우리가 운명이라는 말을 쓸 때에도 좀 비슷하게 사용하고 있지요. 다만 운명이라 하니 ‘앞으로 정해져 있는 무엇’을 가리킨다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장자에게서 운명을 읽는다고 할 때에는 무엇인가 정해져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미래未來란 아직 오지 않는 것, 반드시 올 것을 의미한다기보다는 무엇이 찾아올지 모르는 상태를 말한다고 보는 게 더 맞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운명, 즉 손 쓸 수 없는 상태라고 인식하는 것은 늘 사건이 벌어진 뒤라는 점이에요. 운명을 이야기하는 고전 가운데 하나 <오이디푸스>는 신탁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모습을 잘 그려냈습니다. 결론만 보면 인간은 신이 이야기하는 예정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예정’되었기 때문에 바꾸어보려, 거기서 벗어나려 노력합니다.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라이오스가 오이디푸스를 버렸던 것도, 오이디푸스가 코린토스를 떠났던 것도 모두 주어진 운명의 틀에서 벗어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이디푸스>는 하나의 역설을 이야기하지요. 벗어나려 한 그 행위 자체도 운명의 일부였다고. 


<장자>의 운명이란 예정된 것이 아니라 이미 벌어진 사건입니다. 크게는 둘로 나눌 수 있어요.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으로. 사회적이라 함은 주어진 시대의 조건을 말합니다. 앞서 보았듯 장자는 ‘전국戰國’이라는 시대 위에 살았어요. 물론 ‘전국’이라는 이름은 후대에 붙여준 것이지만 장자 역시 그 표현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을 것입니다. 치열한 전쟁의 시대 위에 장자는 살았어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렇게 주어진 시대적 조건은 선택의 결과가 아니지요. 지난 시간 한 사상가의 말을 인용하며 풀이한 ‘현실’이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현실이란 우리의 선택이나 결정을 넘어서 먼저 주어져 있어요. 그것도 매우 불친절하게. 다시 덧붙여 말하지만 우리에게 친절한 조건을 ‘현실’이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벗어날 수 없기에 그 실체가 더 분명하게 나타나는 조건을 우리는 현실이라 이름 붙입니다.


그렇게 사회적인 ‘현실’, 즉 운명이 있다면 개인적인 운명도 있을 겁니다. 바로 질병이 그것이지요. 현대 의학은 질병의 원인을 다각도로 분석해내었습니다. 모든 질병의 원인을 거의 대부분 밝혀 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렇기에 질병이 운명이라는 장자의 말은 낡고 진부한 말로 들립니다. 그러나 이렇게 질문해보면 어떨까요? 원인을 다 알았다고 하는데 왜 질병을 다 막지는 못할까요? 가장 익숙한 질병 - 감기를 예로 들어 봅시다. 감기는 대체 왜 걸리는 것일까요? 아마 여러 이유를 줄줄 읊어댈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왜 감기를 막지 못할까요? 그건 세상에는 늘 우리가 아는 것 이상이 존재할뿐더러, 설사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역량이 다 좇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늘 우리보다 앞서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의 의학도 원인보다는 결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병이 생겨난 원인을 탐구하는 것은 치료하기 위해서예요. 예방보다. 우리가 언제 병원을 찾는지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병원은 일차적으로는 병을 막기 위한 곳이라기보다는 병을 치료하기 위한 곳이에요. 따라서 제목으로 삼은 장자의 질문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은 예나 지금이나 ‘모른다’가 될 수밖에 없어요. 맞습니다. 장자가 말한 운명이란 어찌할 수 없는 것인 동시에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대종사> 마지막을 보면 자여와 자상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장마가 진 어느 날이었습니다. 연이어 큰 비가 내리는데 자여는 자상이 걱정되었습니다. 비가 내리는 바람에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집에만 있을 텐데 집이 가난한 자상이 굶주리고 있지 않을까 해서 그렇지요. 친절한 자여는 밥을 싸서 자상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자상의 집에 이르렀을 때 자상의 방에서 이런 노랫가락이 들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父邪母邪 天乎人乎 아버지일까, 어머니일까? 하늘일까, 사람일까? 노랫가락이 흔들리는 것이 마치 불평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래서 자여는 자상에게 가 이렇게 묻습니다. “자네는 어찌 그런 노래를 부르는가?” 이때 자상의 대답이 흥미롭습니다. “내가 어찌하여 이렇게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따져보았는데 모르겠더군. 아버지도 어머니도, 하늘도 사람이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힘든 상황에 처했으니 그건 아마도 운명(命)일 테지!” 따라서 운명이란 정확한 대상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을 모아 ‘운명’이라 이름 붙인 것이지요. 



너는 그리고 나는,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자여와 자상은 앞에 나온 두 이야기를 떠오르게 만듭니다. 하나는 자사-자여-자려-자래 넷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자상호-맹자반-자금장 셋, 그리고 공자와 제자 자공의 이야기입니다. 두 이야기 모두 비슷한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우선 뒷 이야기부터 간단히 살펴봅시다.


자상호, 맹자반, 자금장 이 셋은 서로 마음에 거리낌 없는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 셋의 관계에서 나온 말이 바로 막역지우莫逆之友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가까운 관계였는데 그만 자상호가 먼저 죽어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공자는 제자 자공을 시켜 조문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친구의 죽음에도 노래를 부르며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지내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대체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장자의 말을 빌리면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는 공자의 말을 통해 이야기됩니다.) 첫째는 이들이 이무런 거리낌 없이 사는 인물이었다는 점입니다. <장자> 원문의 표현을 빌리면 遊方之外者, 세상 바깥에서 노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죽음 앞에 마땅히 갖추어야 하는 태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공자로 대표되는 유가儒家는 이를 매우 중시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흔히 유가에서 사람이 지켜야 하는 예禮로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이야기합니다. 이 넷 가운데 둘이 죽음과 관련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상喪을 치러야 하고, 죽은 뒤에 그를 기려 제사(祭)를 치러야 합니다. 


오늘날 관례冠禮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혼례婚禮는 매우 중요한 예식이기는 하나 다양하게 새로운 모습을 갖추기도 합니다. 색다른 결혼식이 많습니다. 그러나 상례喪禮, 즉 장례식은 어떤가요? 색다른 장례식이라 할 만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한편 제사는 어떤지 생각해봅시다. 물론 옛날처럼 혼례, 결혼식을 치르지 않듯 오늘날 장례와 제사의 모습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조금 조심스럽습니다. 결혼식을 치르지 않는 것보다 장례나 제사를 치르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지요. 


그런데 <장자>에 그려지는 사람들은 그런 예식 따위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친한 친구의 죽음에도 별 거리낌 없이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보기에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공자는 그들이 세상,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에 그렇다 말합니다. 후대의 표현을 빌리면 이런 사람들을 방외지사方外之士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이들은 이들 나름대로 친구의 죽음을 기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노래를 통해.


따라서 두 번째 부분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해 여느 보통 사람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앞선 네 친구의 이야기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자사, 자여, 자려, 자래 네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사람의 삶이란 없음에서 툭 튀어나와 죽음으로 가는 것이라 말합니다. <장자>의 표현을 빌리면 없음이란 바로 머리이고, 삶이란 등뼈이며, 죽음이란 꽁무니입니다. 사람의 몸에 이 세 부분이 모두 있듯 모든 존재는 이 셋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툭 튀어나와 삶을 누리다 죽음으로 돌아갑니다. 사실 그렇지요. 삶이 있다는 것은 삶 이전과 이후가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런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삶이란 일시적인 과정일 뿐입니다. 삶이란 생성과 소멸 가운데 끼어있는 잠깐의 순간을 말한다고 할 수 있어요. 따져보면 삶 이전의 시간, 삶 이후의 시간이 삶의 시간보다 훨씬 길지 않겠습니까?


간단히 말하면 장자는 죽음이란 삶에 따라붙는 당연한 수순이라 봅니다. 살아가는 존재는 모두 죽기 마련입니다. 다만 평소에 우리가 이를 망각하고 있을 뿐이지요. 따라서 어느 사상가의 말을 빌리면, 우리 모두는 매일매일 죽어갑니다. 장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슬퍼하거나 꺼려할 일이 아니지요. 그래서 <장자>의 어느 부분에서는 장자 아내의 죽음을 두고 노래하는 장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을 두고 억지로 꾸밀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는 게 장자의 질문입니다.


그런데 장자는 조금 복잡합니다. 이 넷의 이야기를 통해 죽음을 막 앞둔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건강한 우리도 장자의 말에 크게 토를 달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어찌 부정할 수 있을까요? 그 사실은 너무도 당연하지만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언젠가 죽을 테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아니잖아요. 하긴 매일 죽음을 인식하고 살기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이들은 모두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여가 병이 나버렸습니다. 이때 병이라는 것을 가볍게 생각하지 맙시다. 고대 사회의 병은 어느 것이든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의학이 발달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치료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하다못해 조선의 임금 가운데도 종기로 죽은 이가 여럿 있습니다. 지금은 종기가 나는 일로 거의 없지만, 설사 종기가 생겨도 고름을 짜내고 약을 바르면 됩니다. 조금 심하다 싶으면 약을 먹으면 곧 나아요. 그런데 옛날에는 작은 상처가 덧나 죽기도 하고, 감기 따위가 심해서 죽는 일도 있었습니다. 장자 시대에 병은 지금보다 훨씬 죽음과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병이 난 자여를 자사가 문병 갔습니다. 가 보니 자여의 몸이 오그라들어 버렸습니다. 마치 곱사등이처럼. 지금처럼 가까운 곳에 병원과 요양원이 있는 시절에는 죽음을 앞둔 사람의 몸을 볼 수 없습니다. 질병은 사람의 몸을 바꿔버립니다. 죽음은 기괴한 신체와 함께 찾아옵니다. 자여는 우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위대하구나! 조물자가 내 몸을 이렇게 바꾸었다니.” 이 소리를 듣고 자사가 묻습니다. “너는 그게 싫은가?”


자여의 답이 재미있습니다. 


“浸假而化予之左臂以為雞,予因以求時夜;浸假而化予之右臂以為彈,予因以求鴞炙;浸假而化予之尻以為輪,以神為馬,予因以乘之,豈更駕哉!”

“나의 왼팔이 점차 변하여 닭이 된다면 나는 새벽을 알리겠네. 나의 오른 팔이 점차 변하여 활이 되면 그것으로 새를 잡겠지. 내 꽁무니가 점차 변하여 바퀴가 되면 정신을 말로 삼아 그 수레를 타겠네. 멍에도 필요 없지 않은가?”

우리는 모두 명확한 종결지를 갖고 있습니다. 루쉰은 그것을 ‘무덤’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거기에 이르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람이 갖고 있는 몸뚱이는 언젠가 사라집니다. 모두 죽겠지요. 그런데 죽음까지 이 몸뚱이가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게 문제입니다. 우리의 몸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자연스러운 변화의 끝은 소멸입니다. 그러나 그 소멸까지 어떤 변화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조금씩 망가질 것입니다. 천천히, 그러나 어느 순간에는 갑작스럽게 큰 변화가 닥칠 수도 있지요. 예를 들어 걷지 못한다거나, 혹은 특정한 작업이 불가능하거나 하는 등.


자여는 이제 이전과 똑같은 상태로 걸을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비틀비틀 걷는 몸. 그러나 장자는 자여의 변화된 몸을 통해 또 다른 길을 찾아냅니다. 비틀비틀 걸으면 되는 것이지요. 왼팔이 오그라들어 팔의 기능을 하지 못하면, 그때 다른 일을 하면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습니다. 청소년들에게는 그런 걱정이 없지만 어느 시점을 지나면 그런 두려움이 조금씩 찾아옵니다.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걱정. 이에 대한 장자의 대답은 놀랍도록 단순합니다. ‘그때에는 그 몸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게 따로 있겠지 뭐.’


이런 놀라운 긍정 가운데 장자는 이 몸이 맞을 미래를 호기심의 영역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이번에는 자래가 죽게 되었습니다. 자려가 문명을 갔어요. 그런데 자여보다 자래의 상태가 더 심각합니다. 숨을 헐떡거리며 임종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때 자려는 주변에 모여 슬퍼하는 가족을 내쫓습니다. 펑펑 울며 그렇게 슬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변화 - 죽음을 맞는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일이라고. 그러면서 자려는 참 느긋하게도 문에 기대어 이렇게 묻습니다. 


“위대한 조화는 너를 어떻게 할까?” 

조화, 이 변화 속에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죽음을 앞둔 친구에게 저런 질문을 던지는 게 어리석어 보이기도 합니다. 숨을 헐떡거리며 죽음을 코앞에 둔 친구에게 당면한 미래는 곧 죽음뿐이지 뭐 다른 게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다음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죽고 나서는… 변화 속에 내던져진 몸뚱이는 어떻게 될까요? 


누구도 자세히 이야기해주지 않지만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의 몸은 곧 부패합니다. 궁금하다면 고깃덩어리를 상온에 두어보면 쉽게 알 수 있어요. 금방 상해버리지요. 사실 시체는 고깃덩어리보다 부패가 더 빠릅니다. 왜냐하면 다른 더러운 것들이 함께 있기 때문이지요.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보면 성스러운 수도사의 몸이 곧 어떻게 부패하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수도자로 살았던 성스러운 수사도 그럴 텐데 일반 사람들의 몸은 어떨지요.


죽고 썩는다. 이 자명한 미래 밖에는 없는 걸까요? 호기심(!) 넘치는 친구 자려는 거기서 몇 발짝 더 나아갑니다. 죽고 사라지면 그만일까요? 그다음에는 무엇이 있지 않을까요? 자려는 우리 몸뚱이가 다시 무엇이 될 거라 말합니다. 다만 그게 윤회 같은 건 아니에요. 이어지는 자려의 말을 봅시다. 


“너는 쥐의 간이 될까? 아니면 벌레의 다리가 될까?” 

참 야속한 친구입니다. 좀 좋은 걸 이야기하지, 쥐의 간이나 벌레의 다리라니!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우리가 죽은 뒤, 이 변화의 끝에는 또 다른 무엇으로 바뀌는데 그 바뀜은 무엇이 무엇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무엇이 무엇의 일부로 바뀐다는 점이에요. 자래가 죽고 쥐의 간이 된다면 그 쥐의 몸뚱이는 또 다른 무엇들이 마구 모여 이루어진 거라 할 수 있겠지요. 


바꾸어 말하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생, 삶 이전에 무엇이 있었고 지금 그와는 다른 혹은 비슷한 내가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내가 아닌, 내 삶의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가늠하기 힘든 많은 게 있었을 거예요.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이 뒤 섞인 존재일까요? 나아가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의 일부로 다시 흩어지게 될까요? 무수한 변화와 변화의 매듭으로 우리는 잠시 존재하고 있습니다.



나는 도를 들었다


우리는 모두 임시적 존재입니다. 임시적 존재라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임시적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라고 하기에 불안정한 무엇이기에 생각보다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임시적 존재로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거예요. 임시적 존재로서 다르게 사는 법이 무엇일까요? <장자>는 이에 대한 해답을 갈구하는 책입니다.


<장자>는 그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주지 않습니다. 다만 그런 ‘다른 삶’을 추구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요. 비록 나이는 많지만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얼굴을 가진 여우女偊의 이야기를 참고해야 합니다. 여우는 모순적 존재입니다. 한참 나이를 먹었는데 어린아이의 얼굴을 가졌다니. 이런 사람이 그려지는지요? 여기에는 무엇인가 비밀이 있지 않을까요? 여우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吾聞道矣”

"나는 도를 들었습니다."

대관절 ‘도’가 무엇이기에. 사실 <장자>를 샅샅이 뒤져 보아도 명확한 답을 찾기 힘듭니다. 장자는 도가 무엇인지 콕 집어 이야기하고 있지 않아요. 참된 것, 참으로 큰 것, 만물 변화의 근원이 되는 무엇이라 생각합시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얻는가 하는 점입니다. 


聞諸副墨之子,副墨之子聞諸洛誦之孫,洛誦之孫聞之瞻明,瞻明聞之聶許,聶許聞之需役,需役聞之於謳,於謳聞之玄冥,玄冥聞之參寥,參寥聞之疑始。

여우의 말을 좀 쉽게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글자의 아들’에게서 도를 들었지. ‘글자의 아들’은 ‘줄줄 외움의 손자에게서 도를 들었다네.’ ‘줄줄 외움의 손자’는 ‘밝게 봄’에게서 도를 들었고, ‘밝게 봄’은 ‘잘 들음’에게서 도를 들었어. ‘잘 들음’은 ‘몸 짓’에게서, ‘몸 짓’은 ‘노래’에서 들었다네. ‘노래’는 ‘아득함’에게서 ‘아득함’은 텅 빔’에게서 ‘텅 빔’은 ‘아리송함’에게서 들었다지.”


순서를 다시 놓으면 이렇습니다. ‘아리송함(疑始)’, - ‘텅 빔(參寥)’ - ‘아득함(玄冥)’ - ‘노래(於謳)’ - ‘몸 짓(需役)’ - ‘잘 들음(聶許)’ - ‘밝게 봄(瞻明)’ - ‘줄줄 외움(洛誦)’ - ‘글자(副墨)’ 우리는 대부분의 지식을 글자를 통해 익힙니다. 여우가 이야기하는 신비한 ‘도’ 역시 글자를 통해 익히고 있습니다. <장자>라는 책을 읽고 있는 지금을 생각해보세요. 다만 글자가 모든 것을 다 선명하게 드러내는 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글자 이전에 더 많은 무엇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자는 문자 이전에 이런 여러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를 세세하게 분석하는 건 좀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장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순서가 아니라 글자 이전에 있는 본질적인 세계의 불투명함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글은 명확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을 낳은, 저 ‘도’라는 건 어떨까요? 더 불투명하지 않을까요? 아득하면서도 아리송한 게 아니겠습니까?


장자는 이 아득하면서도 아리송한 데 도가 있다 말합니다. 그리고 이를 잘 알면 이 임시적 존재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 말합니다. 사실 이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 저도 갑갑하고 막막합니다. 저 역시 장자가 말하는 아득한 도를 찾아 더듬거리며 다니는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말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면 늘 허망함을 감출 수 없습니다. 다만 그의 독특한 시선은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그는 우리 삶의 현실을 냉철하게 꿰뚫어 보면서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이야기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는 우리 삶을 정직하게 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우리 삶을 넘어서는 그 너머 무엇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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