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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un 15. 2019

왜 중국은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을까?

왜 중국은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을까?


중국 관련 문제를 접하면서 떠오르는 질문이다. 최근 이슈가 되는 홍콩 문제 역시 그렇다. 사람들은 문제의 속살을 보기 이전에 일찌감치 중국에게 악마의 얼굴을 덧씌운다. 누군가 이렇게 물었던가? 13억의 얼굴이 어찌 하나겠는가?


작금의 문제가 빚어내는 시급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건을 다루는 데 있어 작동하는 '중국에 대한 몰이해'는 꼭 짚어야만 하는 문제라 생각한다. 모든 입장은 편향적이나 그 편향을 자각하는 것과 자각하지 못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지 않겠는가?  


여전히 우리에게 중국은 야만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레드 컴플렉스, 공산주의 국가 = 전체주의라는 낡은 구도가 작동한다. 붉은 중국에 대한 공포심. 그러나 중국 역사를 넓게 통사적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도리어 이것이 49년 이후 신중국의 문제라기 보다는 도리어 중국 혹은 넓게 보아 아시아 국가에서 보이는 권위주의 체제가 갖는 특징이 아닐까 질문해본다.


1949년 국가 수립 이후 늘 공포와 폭압이 작동했다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이다. 얼마전 세미나에서 마오의 폭력과 덩샤오핑의 폭력을 두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마오의 문혁은 자식이 아비에게, 제자가 선생에게, 현재가 과거에게 자행한 폭력이었다. 한편 천안문 광장의 비극은 어떤가. 국가 권력이 민중에게 자행한 폭력. 이 둘을 동일하게 놓는 것이 옳을까?


중국이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는한 중국은 늘 멈춰있는 세계로 인식된다. 하여 진보의 이름으로 중국을 계몽하고 이끌어야 한다는 낡은 구도가 다시 반복되곤 한다. 그들에게 민주와 인권, 그리고 자유를 가르쳐야 한다고.


그러나 역설적으로 내 눈에 보이는 중국은 자본주의의 최전선에 있으며, 그 결과 권위주의적이며 민족주의적인 경향이 더 강화되고 있는 모습이다. 중국의 후진성이 이 문제의 근간이 아니라, 중국의 선진성이 이 문제의 발단이었다면 어떤가? '중국몽'의 태양 아래 홍콩의 그늘이 만들어졌다면?


일국양제라는 새로운 실험. 나는 그것이 변경에 위치한 우리가, 또한 그와 비슷한 실험을 해야만 하는 미래를 앞둔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홍콩의 특징이라 생각한다. 여전히 늙은이들은 '북진통일'을 외치지만 설사 그런 일이 벌어지겠는가. 그러나 통일은 대박이라는 구호에서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북녁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강요할테다. 총부리를 들이밀지는 않겠지만 그와 비슷한 어떤 폭력이 있겠지.


하여 홍콩의 민주주의가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아니기를 바란다. 자유와 민주라는 구호 속에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현재를 민주주의의 완성태로 치환해버린다. 한겨레 기사 제목을 보자. <홍콩 100만명 시위 뒤엔 “한번도 존중받지 못했다”는 절망감> 나는 그 절망감이야 말로 연대해야 할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라 생각한다. 2019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시 절망감을 심어주고 있는 건 비슷하기에.


상대를 쉬이 악마화하는 것은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게으름의 다른 모습이다. 나는 거리에 나온 홍콩인들의 행진을 지지한다. 그것은 쉬이 말할 수 있는 이유, 그들이 옳기 때문이 아니다. 도리어 그들의 길이 어렵기 때문에 응원한다. 그들이 중국의 길을 걷지 않기 바란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들이 영국의 길을, 혹은 대한민국의 길을 걷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은 그들 만의 길을 가야만 한다.


캐리람(홍콩행정관)이 물러나지 않으면 인민도 물러나지 않는다. (민간인권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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