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중완세가>, <진섭세가>
제목에 주의하자. ‘전경중완’이라 하여 ‘전경-중완’으로 읽기 쉽다. 그러나 이는 시호(謚)와 이름(名)을 함께 붙여 쓴 것으로 ‘경중’이라는 시호를 받은 ‘전완’을 말한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여기서는 자字와 이름이, 시호와 이름이 붙어서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전완의 본래 이름은 진완陳完으로 이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진陳나라 태생이었다. 그러나 어지러운 나라에서 화를 피해 제나라로 달아난다. 이때 제나라의 군주는 제환공. 제환공은 그를 두터이 대했고 그 결과 제나라에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는다. 이때부터 ‘진陳’을 버리고 ‘전田’을 성씨로 쓴다.
<전경중완세가>는 제나라가 어떻게 강姜씨의 나라에서 전씨의 나라로 바뀌는지 서술하고 있다. 전씨가 제나라의 권력을 손에 쥐기 전, 전씨의 세력을 견제했던 인물로 안영이 있다. <관안열전>의 한 주인공이기도 한 그는 제나라의 제상으로 뚝심 있게 군주를 섬겼던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공실을 위협하는 세력을 꺾지 못했고, 군주의 비행을 막지는 못했다.
<세가>는 <전경중완세가>로 춘추전국시대를 매듭짓는다. 춘추전국시대는 주周의 몰락 이후 제후들이 세력을 다투던 시기를 말한다. 한편 기존의 봉건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이들도 이 시대의 주인공이었다. 대부大夫로 제후의 반열에 오르는, 저마다 왕王을 칭하여 이전 제후와는 차별적인 자리를 꿰찬 이들이 있었다. <전경중완세가>의 전씨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흔히 전국시대의 일곱 나라를 꼽아 ‘전국칠웅’이라 부른다. 진-초-제-연-조-위-한. 그런데 이 일곱 나라 가운데 초기 주왕실과 연관이 있는 나라는 연나라 밖에 없다. 본래 오랑캐였던 진은 평왕을 보위한 공으로 제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고. 초는 주왕周王에게 한참이 지나도록 인정받지 못했다. 둘 모두 원래는 변방의 나라였다. 한편 제와 조-위-한은 주나라 초기의 봉건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손에 쥔 경우였다.
그렇다고 전씨가 단순히 힘으로 제나라의 권력을 손에 쥔 것은 아니었다. 희자釐子의 방법이 있었다. 백성에게 세금을 거둘 때에는 작은 말을, 백성에게 베풀 때에는 큰 말을 썼다. 전씨는 이렇게 백성에게 덕을 베풀며 나라의 권력을 차지해갔다. 결국 제강공에 이르러 제후의 성씨가 바뀌었다. 강씨의 제나라에서 전씨의 제나라로.
이후 처음 이름을 떨친 것은 제위왕이었다. 혜왕과 방연이 제나라에 크게 패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제위왕의 손자 제선왕 역시 유명한 인물이다. <사기>에서는 위왕에 비해 짧게 언급되었지만 양혜왕과 더불어 <맹자>에 숱하게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제선왕은 직하라는 곳에 일종의 연구소를 열어 천하의 인재를 불러 모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맹자를 비롯하여 추연, 순우곤 등이 직하를 찾았다. 훗날 순자는 직하학궁의 좨주祭主를 세 차례나 역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제선왕의 아들 민왕에 이르러 제나라는 크게 부침을 겪는다. 제민왕 때에 제나라의 세력은 매우 커서 진나라와 함께 제帝라는 칭호를 쓸 정도였다. 동제東帝와 서제西帝라는 식으로. 이때 소대는 이런 부담스러운 호칭을 버리고 실리를 취하라 말한다. 스스로 '제帝'라 일컫다가는 여러 제후들의 시기를 사게 만들어 결국 진나라의 힘을 강하게 만들 뿐이라는 말. 그는 제라는 호칭을 버리고 송을 쳐서 취하기를 권한다. 당시 송은 걸송桀宋이라 불릴 정도로 악행을 떨치고 있었다.
釋帝而貸之以伐桀宋之事 國重而名尊 燕楚所以形服 天下莫敢不聽 此湯武之舉也 敬秦以為名 而後使天下憎之 此所謂以卑為尊者也 願王孰慮之 於是齊去帝復為王 秦亦去帝位
여기에는 겸양의 태도를 내보이며 걸송을 쳐 빼앗아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얻을 뿐 아니라, 과도한 호칭을 쓴 진을 견제하겠다는 의도가 숨어있었다. 결국 진도 ‘제’라는 칭호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송을 정벌하고 크게 세력을 떨쳤으나 과한 힘은 다른 나라의 견제를 피할 수 없었다.
연-진-초-삼진이 함께 모여 제를 치기에 이른다. <사기>는 제나라가 ‘기왓장처럼 부스러졌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때 제나라의 수도를 함락시킨 것이 바로 악의였다. 그러나 위기 상황에도 불가능은 없는 법. 전단은 즉묵의 군대로 연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제나라의 옛 세력을 회복한다. 이 이야기는 <전단열전>에 실려 있다.
조나라가 진나라의 공격을 받게 되었을 때 조나라를 구원하느냐를 두고 논란이 벌어진다. 주자周子는 조나라를 구하여 진나라가 동쪽으로 나오는 일을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비유로 든 것이 바로 순망치한脣亡齒寒이었다. 조나라의 몰락은 곧 제나라에 화를 미칠 것이라는 예상.
不如聽之以退秦兵 不聽則秦兵不卻 是秦之計中而齊楚之計過也 且趙之於齊楚 捍蔽也 猶齒之有脣也 脣亡則齒寒 今日亡趙 明日患及齊楚
그러나 제왕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구원병 없이 진을 상대해야 했던 조는 진에게 크게 패한다. 바로 장평전쟁! 결국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제나라는 진나라의 군대를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형세는 진나라로 기울어진 상황이었고 결국 제나라도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본디 <전경중완세가> 다음이 <공자세가>이나 흐름상 <전경중완세가>와 <진섭세가>를 묶어 읽고 <공자세가>를 따로 다루기로 한다. 이미 <전경중완세가>에서 전국시대의 끝을 보았는데 공자의 이야기를 이어 붙이는 것은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나름 간주곡 같은 느낌의 부분. 이를 빼고 <전경중완세가>와 <진섭세가>를 붙여보면, 앞이 제후국에서 대부가 권력을 찬탈하여 왕이 되었다가 결국 진에게 멸망당하는 이야기라면, 뒤는 진의 몰락 이후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진을 중심으로 앞 뒤 서로 다른 난세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진섭세가>는 진섭 한 사람의 이야기로 압축해도 모자랄 것이 없다. 그는 진나라에 대항하여 처음으로 봉기를 일으킨 인물로 유명하다. 여러 사람이 지적하였듯 신분으로만 따지면 <세가>의 반열에 오를 인물이 아니나 사마천은 그를 <세가>에 놓았다. 그것도 <열전>과 같은 스타일로.
이를 위해서일까? 사마천은 진섭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통해 그가 커다란 포부를 가지고 있던 인물이라는 점을 전한다. 참고로 사마천은 진섭과 같은 인물, 커다란 뜻을 품은 이들을 아낀다. 공과에 상관없이.
陳涉少時 嘗與人傭耕 輟耕之壟上 悵恨久之 曰 茍富貴 無相忘 庸者笑而應曰 若為庸耕 何富貴也 陳涉太息曰 嗟乎 燕雀安知鴻鵠之志哉
잘 알려진 대로 진섭은 오광과 함께 수자리를 사는 인물을 모아 호송하는 일을 맡는다. 그러나 중간에 큰 비를 만나 기한에 늦게 되었다. 늦게 도착하면 목 베임을 당해야 하는 진나라의 혹독한 법 아래 그는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今亡亦死 舉大計亦死 等死 死國可乎
앞으로 나아가도 죽고, 뒤로 도망가도 죽는다. 어차피 죽을 것, 나라를 도모해 보는 것이 어떤가?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다. 앞으로도 뒤로도 길이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낸다. 죽음뿐이라는 사실에서 죽음의 의미를 다르게 만들 것.
公等遇雨 皆已失期 失期當斬 藉弟令毋斬 而戍死者固十六七 且壯士不死即已 死即舉大名耳 王侯將相寧有種乎
새로운 죽음으로 발을 내딛기로 결심한 뒤, 사람들을 규합하여 설득하는 말도 인상 깊다. 이후 2000년 수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린 한 마디가 그의 입에서 나왔다. ‘어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느냐?(王侯將相寧有種乎)’ 결과적으로 이 말은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말이었다. 전통적인 신분 체계를 부수는 말. 얼마 지나지 않아 평민 출신 황제가 탄생한다.
그러나 그의 시도가 미완이었음 역시 역사는 기록한다. 그는 오광과 함께 억울하게 죽은 진시황의 맏아들 부소, 초나라의 전쟁영웅 항연의 이야기를 빌어 백성의 마음을 모으고자 한다. 진섭 역시 이전 시대에 속한 인물이었다. 어찌 되었건 그의 계획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삽시간에 수많은 사람을 모아 거대한 세력을 이룬다. 다만 빨리 쌓은 탑은 쉽게 무너지는 법. 그의 봉기는 6개월 만에 끝나고 만다.
<사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 가운데 그처럼 공과를, 특히 과실을 쉽게 말할 수 있는 이도 드물다. 그는 천하에 대한 비전이 없었으며 사람을 쓸 줄 몰랐다. 반란의 불씨는 되었지만 이를 지켜갈 능력이 없었다. 탐욕스러운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시적이라고 해도 그의 성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쉽게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후에도 진섭과 같이 한 시대의 균열을 드러내는 자들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최초의 농민 반란으로 높이 숭상받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어쩌면 시대의 균열은, 시대의 종언은 매우 우연하게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오는지 모르는 일이다. 춘추전국이, 주나라의 봉건체계가, 진나라의 황제라는 새로운 시스템을 부정하는 새로운 발상, 새로운 시도가 어느 빼어난 인물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나올 법한 인물에게서 나온 말이라면 그처럼 큰 울림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의 전환은 예외적 상황을 맞아 도래한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그렇듯 이는 사후에야 깨닫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역사의 단절이 벌어진 뒤에야 우리는 다른 시대의 공기를 마신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그러함에도 그 차이에 무딘 사람들이 있다. 혹은 그 단층을 주목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사마천은 진섭을 <세가>에 넣었다. 아주 예외적으로. 이는 그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차치하고 그로 대표되는 ‘역사적 사건’을 예리하게 읽어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그런 예외적 사건이 담길 만한 그의 묵직한 삶도 사마천의 관심을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