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사기읽기

<사기세가>읽기 #7

<공자세가>

by 기픈옹달

중국 역사에 끼친 공자孔子의 영향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여느 제자백가와 달리 <세가>에 이름을 올렸다. 이를 문제 삼는 경우는 없다. 예를 들어 항우나 여태후가 <본기>에, 진섭이 <세가>에 이름을 올린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다른 제자백가와 마찬가지로 <열전>에 놓고 숫자를 헤아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렇게 보면 70 열전이 진섭과 공자를 더해 72 열전이 되고, 30 세가는 항우와 여태후를 더해 여전히 30세가, <본기>는 12 본기에서 10 본기가 된다. 72라는 숫자를 중시 여기는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접근이겠으나 크게 의미 있는지는 모르겠다.


<공자세가>는 공자의 생애를 보여주는 기록으로 후대 많은 사람에 주목을 받았다. <논어>에는 공자의 여러 말을 실렸으나 구체적인 행적이 없어 생애를 구성하기 힘들다. <공자가어>는 위작으로 논란이 많다. 결국 인간 공자의 생애를 살펴보려면 <공자세가>를 보는 수밖에 없다. <논어집주>를 정리한 주희 역시 <논어서설>에서 <공자세가>를 참고하였다. 그 유명한 시작이 이렇다. ‘史記世家曰’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은 <공자세가>를 전폭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세가>나 <열전>의 많은 부분이 그렇듯 역사적 실제와는 차이가 적지 않다는 연구가 많다. 오류가 많은 기록이라고 하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하겠으나 그 입장은 크게 엇갈린다. 한쪽에서는 사마천 역시 공자를 매우 존숭하여 <공자세가>를 썼다고 본다. 한편 다른 한쪽에서는 사마천이 의도적으로 공자를 폄하했다고 보기도 한다. 이 차이는 단순히 공자에 대한 사마천의 입장에 그치지 않는다. 사마천의 <사기>가 공자의 <춘추>를 계승했는가, 사마천이 유가적을 가졌는가도 연관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의견을 따르는 편이다. 사마천의 기술 태도가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고 본다. 아울러 사마천의 <사기>는 <춘추>를 계승했다기보다는 <춘추>와는 다른 역사관 혹은 역사의식으로 기록되었으며, 사마천은 유가적이라기보다는 도가적, 더 구체적으로는 잡가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생각한다.


이처럼 <공자세가>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정확하지도 않으며 의도적으로 공자를 곡해했음에도 <공자세가>의 중요성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어쨌든 후대 유가 지식인들은 <공자세가>의 기록을 통해 공자의 생애를 읽었고, 사마천 개인의 입장과 무관하게 당시 한무제 시기 공자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을 담고 있다 보기 때문이다. 사마천 개인, 역사적 공자와 떼어놓고 생각하면 유가적 상식이 그려낸 공자, 신화적인 공자상은 <공자세가>에서 시작한다.


한무제는 파출백가罷黜百家 독존유술獨尊儒術을 주장한 인물로 유명하다. 제자백가의 설을 내쫓고 유가를 국가 이념으로 삼겠다는 선언이다. 여기에서 빛나는 인물이 동중서. 그렇기에 저 유명한 펑유란의 <중국철학사>는 동중서를 중심으로 ‘자학시대子學時代’와 ‘경학시대經學時代’로 나뉜다. 제자백가에서 유가독존의 시대로, 자유로운 사상가의 시대에서 정형화된 경전의 시대로. 이 전환이 어떤 속도로 언제 이루어졌는가는 의문이다. 다만 이런 변화 가운데 사마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후대의 평가, 사마천 개인의 입장과 무관하게 공자가 제후, 공公/왕王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는 것은 사마천 시대에 이미 공자가 크게 존숭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야기는 공자 당대 혹은 그 이후에도 한동안 공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당대의 공자는 천하를 유랑하는 유세객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사기>를 읽어 보아도 공자의 행적은 당대의 역사적 정황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공자 자신도 이토록 크게 존숭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공자, 춘추전국이라는 구체적인 역사 위를 살았던 인물을 만나려면 사마천의 기록을 경계하며 읽어야 한다. 사마천 개인의 실수, 왜곡 뿐만 아니라 당대의 우상화라는 요소를 모두 고려해서.


孔子生魯昌平鄉陬邑 其先宋人也 曰孔防叔 防叔生伯夏 伯夏生叔梁紇 紇與顏氏女野合而生孔子 禱於尼丘得孔子 魯襄公二十二年而孔子生 生而首上圩頂 故因名曰丘云 字仲尼 姓孔氏

공자의 출생에 대한 간단한 상황. 아버지는 숙량흘 어머니는 안씨였는데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 숙량흘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자字와 명名을 붙여 쓴 것인데 낯설다. 공흘孔紇이 되어야겠지만 그렇게 표기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혹자는 아버지가 불분명한 공자의 출생을 설명하기 위해 공자의 고향, 창평향 추읍 출신의 이름난 무사를 아버지의 이름으로 삼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튼 공자에게 아버지의 영향은 찾아보기 힘들다.


야합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공자의 자가 중니仲尼라는 점을 생각하면 공자의 형이 있었다는 뜻이다. 주석에 따르면 아버지 숙량흘과 어머니 안씨의 나이가 50살 넘게 차이 났다고 전해진다. 딸은커녕 손녀뻘 되는 이와, 그것도 정식 혼인 관계가 아닌 상태로 공자를 낳았다. 이것은 대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게다가 <공자세가>는 공자가 어렸을 때 아버지 숙량흘이 일찍 세상을 떠났으나 그 무덤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서자 출신에다 본가와 별 인연이 없는 삶. 공자의 어린 시절이 빈천貧賤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후대 사람들은 공자의 가계에 대해, 공자의 출생에 대해 많은 설화를 낳았지만 정작 공자는 별 볼 일 없는 출신이었다. 기대만큼 훌륭한 인물로 공자는 태어나지 않았다. 공자를 성인으로 본 전통적 시각에서는 이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겠지만, 오늘날에선 그의 소박한 출생은 도리어 그 인물의 위대함을 설명하는 계기가 되곤 한다. 귀족 출신 사상가와 평민 출신 사상가 가운데 누구에게 더 관심이 가는가.


<공자세가>는 공자가 젊은 시절 고국 노나라를 떠난 사건을 기록한다. 주나라에 가서 노자를 만나고 온 일이 그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노자는 공자의 스승이 된다. 아마 이는 후대에 창작되어 삽입된 이야기일 것이다. 이 내용은 먼저 <장자>에서 볼 수 있다.


한편 <사기>에서는 공자의 재능을 시기하는 여러 사람, 그로 인해 벌어진 사건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과연 공자는 이웃나라에 위협을 줄만큼, 예를 들어 제나라의 안영이 견제할 만큼 훌륭한 재능을 지닌 인물이었을까? 공자가 등용되었다면 당대에 이름을 떨친 인물처럼 커다란 업적을 세울 수 있었을까? 태공망이나 관중에 비길만한 인물이라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사기>는 공자가 노나라에서 사공, 대사구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역시 의심할 부분이다. 능력은 둘째치고 공자처럼 비천한 출신이 재상의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는지. 공자를 가장 잘 보여주는 기록이라는 <논어>에서는 공자의 관직 생활에 대해 별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추측해보면 설사 공자가 관직에 올랐다 하더라도 중직을 맡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기>는 신하로서 그의 업적을 여럿 소개한다. 그러나 <논어>와 후대 유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공자의 품성이었다.


따라서 노나라와 제나라 사이의 회담에 공자가 활약한 이야기나 소정묘를 주살한 이야기 등은 경계하며 읽을 필요가 있다. <사기>는 공자의 재능을 걱정한 제나라가 여악女樂을 보내었고, 이를 받은 계환자가 정사를 돌보지 않자 이에 실망한 공자가 노나라를 떠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앞서 본 것처럼 이를 곧이 믿기 어렵다.


과연 공자는 왜 고향 노나라를 떠나 그 유명한 주유천하周遊天下를 한 것일까? 일반적으로는 고향 노나라에 실망한 이후 자신의 뜻을 펼칠 새로운 나라와 군주를 찾아 여정을 떠났다고 본다. 그렇다면 공자는 왜 어느 나라에서도 정착하지 못했을까? 게다가 그때 그의 나이는 이미 쉰을 한참 넘었다. 그 시대, 그 나이에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시 노나라의 실력자, 삼환三桓과의 갈등 끝에 공자가 쫓겨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 해석에 귀 기울일만한데 이후 공자는 계환자의 아들 계강자가 부른 뒤에야 고향 노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달리 말하면 공자는 스스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공자의 방랑은 어떤 결단에 의한 자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내쳐진 까닭에 시작된 것이었다. 추방된 공자의 모습. 상갓집 개 같은 모습이었다.


東門有人 其顙似堯 其項類皋陶 其肩類子產 然自要以下不及禹三寸 纍纍若喪家之狗

처량한 공자는 여러 곳에서 곤욕을 겪기도 한다. 광에서는 양호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구금되었고, 사마환퇴는 그를 해치려 하였다.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는 굶주림에 고생한 일도 있었다. 어디에서도 공자를 반기는 사람 이야기를 듣기 힘들다.


공자는 자로의 처형 안탁추의 나라 위나라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논어>에는 당시 군주 위령공과 나눈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한편 위령공의 부인 남자와의 사건도 실려있다. 그런데 <사기>의 내용은 더 자세하다.


靈公夫人有南子者 使人謂孔子曰 四方之君子不辱欲與寡君為兄弟者 必見寡小君 寡小君願見 孔子辭謝 不得已而見之 夫人在絺帷中 孔子入門 北面稽首 夫人自帷中再拜 環珮玉聲璆然 孔子曰 吾鄉為弗見 見之禮答焉 子路不說 孔子矢之曰 予所不者 天厭之 天厭之

‘環珮玉聲璆然’ 남자와 만났을 때 울린 옥 장식의 소리는 어떤 여지를 남겨준다. <논어>와 달리 <사기>에서는 다른 상상이 가능한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때문에 이 부분이 사마천이 공자를 악의적으로 기술한 부분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를 그저 흘려들을 수 없는 게, 그렇게 맹세하였던 공자가 포蒲땅의 사람들에게서 풀려나기 위해 거짓 맹세를 한다. 게다가 거짓 맹세로 포땅의 위협에서 빠져나온 공자는 위령공에게 포땅을 칠 것을 종용하기도 한다.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겪은 고생에 대해 사마천은 많은 분량을 들여 기술한다.


詩云 匪兕匪虎 率彼曠野 吾道非邪 吾何為於此

공자의 질문은 이렇다. 어째 우리는 이렇게 오가며 고생하는가? 나의 도가 잘못되었는가? 아니면 어째서인가?


意者吾未仁邪 人之不我信也 意者吾未知邪 人之不我行也

夫子之道至大也 故天下莫能容夫子 夫子蓋少貶焉

夫子之道至大 故天下莫能容 雖然 夫子推而行之 不容何病 不容然後見君子 夫道之不修也 是吾醜也 夫道既已大修而不用 是有國者之醜也 不容何病 不容然後見君子

차례대로 자로, 자공, 안연의 대답이다. 자로는 우리가 인하지 못하며 지혜롭지 못해서가 아니겠느냐고 묻는다. 자로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 말한다. 자공은 세상에 문제가 있다 말한다. 천하가 커다란 공자의 뜻을 수용하지 못한다. 한편 안연은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없는 거라 말한다. 현실을 바꾸기도 힘들고 이상을 버릴 수도 없다. 그러니 이 이상을 지켜 나가자


안연의 말처럼 공자가 거대한 이상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공자의 삶이 당대 여러 인물의 삶과는 다른 지점을 만들어 낸 것은 분명하다. 그의 주변에는 제자들이 있었고, 정확한 인원을 알 수는 없지만 적지 않은 수가 그 고난의 길을 함께했다. 만세의 스승, 이것이야 말로 공자가 위대한 이유가 아닐까. 그는 사람을 길러낼 줄 알았다.


孔子以四教 文行忠信 絕四 毋意 毋必 毋固 毋我 所慎 齊戰疾 子罕言利與命與仁 不憤不啟 舉一隅不以三隅反 則弗復也

<사기>는 공자가 지었다는 여러 글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공자는 5경을 편집, 서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시경>, <서경>, <역경>과 <춘추>, <예기>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의심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공자가 저자 혹은 편집자였다면 어째서 <논어>는 그렇게 거친 형태로 남아 있는가? 게다가 <논어>는 공자의 저술이나 편집 작업에 대해 별 언급을 하지 않는다. 5경의 권위를 만들면서 공자의 이름을 가탁한 것은 아닐지.


공자는 제자들 품에서 세상을 떠난다. 안타깝게도 그의 아들은 이미 먼저 세상을 떠난 상황이었다. 애제자 안연도 죽었고, 곁을 지키던 자로도 죽었다. 제자들은 선생의 장례를 치르고 3년간 상을 치렀다. 그 가운데 자공은 3년을 더하여 6년상을 치렀다. 안연, 자로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 자공이었다. 그러나 후대 유학자들은 자공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공자의 무덤은 이후 공씨네 마을이 되었고 커다란 건물을 만들었다. 오늘날에는 공묘孔庙라 부른다. 자금성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건축군이라고. 사마천 이후에는 공자의 지위가 더 높아져 황제조차도 공자를 숭상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천하의 일인자인 황제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대상이 된 것. 과연 그것이 공자 개인에게 좋은 일인지는 따로 따져보아야 할 일이다.


공자는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묘도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러나 공자는 여전히 늘 살아 있는 존재이다. 역사를 보면 수 차례 공자를 살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공자는 여러 모습이 뒤섞인 상태로,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강력한 영향력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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